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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상순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by 답설재 2016. 4. 7.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박 상 순

 

 

의정부에 갔었음.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원인데 봄날인 줄 알았음.

그래도 혹시나 둘러만 볼까, 생각했는데, 아뿔싸

고독의 아버지가 있었음. 나를 불렀음.

환자용 침상 아래 거지 같은 의자에 앉고 말았음.

괜찮지요. 괜찮지. 온 김에 네 집이나 보고 가렴.

바쁜데요. 바빠요, 봐서 뭐해요. 그래도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으니, 여기저기, 여기니, 찾아가보렴.

옥상에 올라가서 밤하늘만 쳐다봤음. 별도 달도 없었음.

곧바로 내려와서 도망쳐 왔음.

도망치다 길 잃었음. 두어 바퀴 더 돌았음.

가로등만 휑하니 내 마음 썰렁했음. 마침내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는 집, 여기저기 맴돌다가 빠져나왔음.

 

의정부에 다시 갔음. 제대로 갔음. 길바닥에 서 있었음.

내 봄날이 달려왔음. 한때는 내 봄날, 스무 살이었는데, 이젠

쉰 살도 넘었음. 그래도 내 봄날의 스물두 살 시절,

남산공원 계단을 내려오던 그날에, 내 두 눈이 번쩍 뜨이고

내 가슴속의 쇠구슬들이 요란하게 덜커덕거렸음.

분홍 신, 남빛 치마 잊히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던 내 봄날.

앗, 봄날, 아, 봄날, 그날 오후 내 봄날이, 봄날, 봄날, 봄날.

여기도 봄날, 여기도 봄날. 봄날을 속삭였음. 세월은 갔음.

 

의정부에 갔었음. 봄빛은 다 지고, 초가을에 갔었음. 쉰 살 넘은

내 봄날을 다시 만났음. 밥 먹었음. 차 마셨음. 손 내밀었음.

내 손등, 봄날 손등. 찻잔 옆에 모아놓고 보니, 마음만 휑했음.

그래도 내 봄날은 아름다웠음. 다정하고 쓸쓸했음. 그 봄날이,

죽기 전에 다시 올게, 네 죽음을 지켜줄 그 누구도 없다면.

봄날이 내게 말했음. 누가 있겠음? 나 혼자 밥 먹었음.

내 봄날만을 생각했음. 푸르른 나뭇잎 하나

억지로, 쉰 살 넘은 내 봄날의 가방 속에 넣어주고……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 유치원의 점심시간.

 

요리사가 된 내 봄날이 아침부터 요리를 하고

뒤뚱대고, 자빠지는 아장아장 새싹들이 오물오물 점심을 다

먹고 나면, 바닷가 빵집 지나, 섬마을 우체국 지나 쉰 살 넘은

내 봄날이 파도 소리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 의정부가 있었음. 그 길에서, 긴 총 옆에 놓고

비탈에 누워 있었음. 총알은 없음. 오래전 남산공원

계단에서 덜커덕거리던 내 가슴속 쇠구슬들이 단거리 대공포

총탄이 되고, 무거운 포탄이 되니, 가슴이 무거워서 누워 있었음.

울긋불긋 가을도 내 옆에, 총알 없는 빈총처럼 뻗어 있었음.

가슴이 무거워서 나자빠져 있었음. 그런 의정부에 갔었음.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실인데 또 잘못 알았음. 아뿔싸

겨울이 왔음. 창밖엔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는데, 누가 있겠음?

아직도 치료 중인 내 봄날, 이번엔 고독의 할아버지가 부르셔도

환자용 침상 아래 이 거지 같은 겨울 의자엔

앉지 않겠음.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누가 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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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1961년 서울 출생. 199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Love Adagio』. <현대문학상>등 수상.

 

 

                                                                                                     『현대문학』 2016년 1월호, 256~259쪽.

 

 

 

 

 

 

 

봄날이 가고 있습니다.

시인의 일기장을 들여다본 것 같았습니다.

미안해서

시인의 봄날도 덜 쓸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쓸쓸한 봄,

지난겨울의 책들을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아스라한 기억이 되어버렸던 그의 이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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