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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늙음9

그녀를 위한 눈물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을 때는 좀 일러서 단 두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녀였고, 말이 없었고, 너무 가라앉은 분위기여서 한 번만 더 쳐다보고는 그만 봤습니다. 예사로운 장면이었다면 마음놓고 몇 번 더 살펴봤겠지요. 어머니는 많이 늙었고, 딸은 삼사십 대?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냉랭한 표정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서 나가면서도 그들 사이에는 단 한 마디 대화도 없었습니다. 딸이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바닥에 무거운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두 명의 여 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습니다. 그런데도 딸과 어머니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출입구와 홀 사이에 파티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참만에 일어나는 듯했습니다. "괜찮아요.. 2023. 9. 27.
나이듦 : 알고자 하던 지성, 행하려던 의지가 부질없어 보인다 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은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 바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성미가 불칼 같고 젊은이 뺨치게 혈기방장한 이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이 험한 모험의 가시밭길이었다. 어쩌면 우베르티노는 성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굳센 믿음의 값을 한 자리 성위(聖位)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23. 6. 27.
"나도 한때는 새것이었네" 모처럼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아침을 굶고 가서 채혈을 했고 러닝머신에 올라가서 걷고 뛰어야 하니까 빵과 커피로 아침을 때울까 싶어서 그걸 샀지만 내키지 않아서 차에 갖다 두고 네 가지 검사를 더 받았습니다. 모처럼이었으므로 그동안 변한 것도 있어서 질문을 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절합니다. 그렇다고 "참 친절하시네요" 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지?' 친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뭘 물으면 간단히 대답하면 될 걸 가지고 아예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걸 보면 '노인이라고 이러는구나' 싶지만 끈기 있게 듣습니다. 그렇게 어린애에게 설명하듯 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세요" 하거나 "나는 이 병원 십삼 년째 드나듭니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21. 7. 4.
엄연한 '노후' 1 날씨가 좀 풀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마나입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이제 집에 들어가도 좋은 시간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걸 감추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굳이 그걸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마나일 것입니다. 2 몰라서 그렇지 세상은 무저갱입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해도 금방금방 까무루해집니다. 그렇게 까무룩해져서 아래로, 그 아래로, 어디가 바닥인지도 모를 구렁텅이로 자꾸자꾸 내려갑니다. 많이 내려가면 정신을 차려봤자 다 올라오지도 못한 채 또 까무룩해집니다. 누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그 문제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결론이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얘.. 2018. 12. 23.
늙어가기 Ⅰ 일요일 새벽은 부지런한 이웃 주민이 폐품을 정리하는 소리로 시작됩니다. 그 순간에 부스스 잠을 깹니다. 이 아파트의 우리 동(棟)은 앞과 옆이 열려 있어서 이웃 주민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훤히 보이고 그 길가에 재활용 분리수거함들이 놓여 있습니다. 빈 병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일요일 새벽이구나. 그새 또 일주일이 지나가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일요일 새벽의 기억들은 쉽게 겹쳐지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이 무슨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저 텅 빈 시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월이 빨리 흐른다는 느낌은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Ⅱ 순간(瞬間), 순식간(瞬息間).1 처음에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으로써 이 말들을 .. 2015. 8. 19.
후순위라도 괜찮겠습니까?-퇴임을 앞둔 선생님께 Ⅲ 12월입니다. 연일 기온이 떨어지니까 이젠 겨울입니다. 퇴임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준비, 그 준비가 미흡하니까 퇴임하면 곧 순식간에 늙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몇 년 더 살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 아침에 더러 경춘선 ITX 열차를 탑니다. 물론 일반 전철을 더 자주 탑니다. ITX(Intercity Train eXpress)는 '청춘(靑春) 열차'라고도 부르는 고급 열차여서 일반 전철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KTX에 버금간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청춘! 그렇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열차는 젊은이들이 많이 탑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곧잘 값이 싼 일반 전철을 타고, 그리 바쁘지도 않을 것 같은 ──이게 바로 착각이겠지요── 젊은이들은 '청춘' 열차를 탑니다. 선생님께서는.. 2012. 12. 3.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칼 필레머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박여진 옮김, 토네이도미디어그룹, 2012 지난여름 산은 저렇게 부풀어 오르다가 어디가 툭 터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었습니다. 요즘은 아주 조용합니다. 그렇게 몇 달을 조용하게 지낼 것입니다. '어디 두고 봐라. 나는 기어이 다시 돌아온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표정입니다. 그러니까 서글프게 보이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 같긴 합니다. 감동했다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여럿에게 사준 책을 나도 받았습니다. 처세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는 듯 혹은 이 책은 정말로 제대로 된 처세술을 알려준다는 듯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 오늘날 서점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 2012. 11. 29.
소극적으로 살기의 즐거움 전에도 소개한 적 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버트런트 러셀은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라는 글에서 지겨운 사람이 되는 갖가지 방법들과 그것을 피하는 방법들을 정리해 일곱 권으로 된 학술논문을 쓸까 생각 중이라고 너스레를 뜰고 난 다음, 그 일곱 가지 부류의 기본에 속하는 사람으로 ❶ 계속되는 변명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❷ 지나친 근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❸ 스포츠 이야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을 들었습니다. 그가 그 다음으로 든 지겨운 사람은, ❹ 현학적인 태도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❺ ( ), ❻ 허풍, 즉 자화자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말하자면 ‘속물’, ❼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 최악의 부류로 거의 예외 없이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여성들이여! 어쩔 수 없이 인용합니다. 미안합니.. 2012. 7. 10.
돌아가는 길 1 당시 이 사진을 받아보고는 '어쩌다가 내 모습이 이렇게 변했나' 했습니다. 변하기 시작하니까 금방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제 '돌아가는 길'이나까요. 다시는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이 길……. 그나저나 또 세월이 가서 다시 들여다본 이 사진은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 몰골에 비하면 뭐랄까 새 신랑 같습니다. 십육 년? 아득한 날들입니다. 2009.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