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일요일 새벽은 부지런한 이웃 주민이 폐품을 정리하는 소리로 시작됩니다. 그 순간에 부스스 잠을 깹니다. 이 아파트의 우리 동(棟)은 앞과 옆이 열려 있어서 이웃 주민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훤히 보이고 그 길가에 재활용 분리수거함들이 놓여 있습니다.
빈 병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일요일 새벽이구나. 그새 또 일주일이 지나가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일요일 새벽의 기억들은 쉽게 겹쳐지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이 무슨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저 텅 빈 시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월이 빨리 흐른다는 느낌은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Ⅱ
순간(瞬間), 순식간(瞬息間).1
처음에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으로써 이 말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은 주제넘은 생각도 했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2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지만, 삶의 덧없음을 금강경 '공(空)' 사상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아름답고도 허무한 꿈 이야기,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3은 사실은 매우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Ⅲ
수많은 일주일들이 그렇게 가버려서 '이런!' 어느새 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무얼 잘못 했습니까?
노인이 되지 않는 방법, 천천히 노인이 되는 방법 같은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늙지 않는 방법' '천천히 늙는 방법'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가능한 한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도 말고, 얼른 포기할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노인으로 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길을 써 놓은 글에서 찾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Ⅳ
늙으면 왜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한 김대식 교수(KAIST)는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예의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했습니다.4
졸고 '늙으면 시간이 정말 더 빨리 가나'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635)
"늙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의 무관심입니다. 자연이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가지고 우리가 울고불고할 수도 있겠는데, 저는 이걸 오히려 아주 좋게 보고 싶어요. 늙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자연의 무관심으로 해석한다면 상당한 자유가 생긴다는 거죠. 결국 늙음이라는 건 남이 나한테 준 의미가 아니고, 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의외이긴 하지만, 이런 뜻이라면 당연히 공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열다섯에 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서고, 마흔에 不惑하고, 쉰에 天命을 알고, 예순에 耳順하고, 일흔에 하고싶은 바를 좇되 法度를 넘지 않았느니라."5
Ⅴ
여기에 이르러 또 막막해집니다.
하는 일마다 신경이 쓰이고, 원망을 들을 일들 같고, 한 발자국도 쉽지 않습니다. 쑥스럽지만 아내가 보기에는 나는 아직 단 한 걸음도 나아진 점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것도 매양 같고 점잖지 못한 것도 그렇고, 미흡했던 모든 점이 아직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 "저도 이제 7학년이 된지 오래입니다" 할 수 있게 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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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깜짝할 사이의 매우 짧은 동안',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만한 극히 짧은 동안'(DAUM 사전).
- 한바탕 꿈을 꿀 때처럼 흔적도 없는 봄밤의 꿈이라는 뜻으로,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DAUM 사전).
- 중국의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 약어 접몽 (蝶夢) 유의어 장주지몽 (莊周之夢) , 호접지몽 (胡蝶之夢).(DAUM 사전).
- 조선일보, 201503.28. Weekly BIZ C4~5. 지식 콘서트 '뇌, 현실, 그리고 인공지능' - “나이 먹는다는 건 자연이 내게 무관심해졌다는 것, 그리고 자유가 생겼다는 것…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 原文──爲政 四 子曰 『五十有五에 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호라』(表文台 역해 『論語』, 현암사, 1972,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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