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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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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 삶과 아름다움 사이의 절망적 간극 극복 방법 여기 돈이 많아서 집 안을 아름답게, 화려하게 꾸며놓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젊은이가 있다. 누추한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우울해하는 그 젊은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에세이에 등장한다. 젊은이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서 식탁보 위의 나이프, 먹다 만 과일 조각,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 찬장 위 술병 옆의 고양이를 둘러보며 서글퍼하고 혐오감을 느낀다. 프루스트는 이 젊은이가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싶어서 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게 하되 웅장한 궁전을 그린 베로네세, 항구 풍경을 그린 클로드, 군주의 생활을 그린 반다이크의 그림보다는 장 바티스트 샤르댕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화가 샤르댕은 과일 그릇, 주전자, 커피 주전자, 빵 덩어리, 나이프, 와인이 담긴 유리잔, 납작한.. 2024. 1. 4.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갈릴레이의 생애》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 마음이 많이 흔들려서였는지 "갈릴레이의 생애"는 굳이 읽어야 할까 싶었었는데(그 과학자의 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좀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극작가는 이 과학자를 어떻게 보았을까?' 싶어서 좀 읽다 그만두더라도 일단 읽어보자 싶었다. 그랬는데 (이런!) 그게 아니었다. 좀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고 그것이 부끄러워서 몰입하게 되었고, "서푼짜리 오페라"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보다 감명 깊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발견한 별들을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에게 보여주는 장면, 더 나은 생활을 하며 연구에 열중하고 싶어 어린애인 피렌체 .. 2024. 1. 3.
마침내 2024년 1월 1일 마침내 새해다. 큰 소망은 없다. 지난해는 이미 구겨진 심신이 더 구겨진 한 해였지만 올해도 지난해와 별로 다름없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마지막을 향해 더 가까이 가는 건 정해진 일, 다행한 일이고 온갖 번민은 좀 줄어들면 더 좋겠다. 그건 욕심이니까 그 대신 나의 결점, 단점 같은 게 줄어들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렇게 또 한 해가 흘러가기를 바라는, 나름 새 아침이다. 2024. 1. 1.
2023년 12월 30일, 토요일, 눈 눈이 또 옵니다. 올해는, 예년 같으면 한두 번 올까 말까 한 12월에 엄청 옵니다. 오늘내일만 지나면 2024년인데 안 되겠다는 듯 마지막까지 눈으로 채웁니다. 펄펄 내리다가 지금은 그냥 조용히 퍼붓습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잠시 그런 느낌도 있었습니다. 봄은 저 멀리서 오고 있겠지요. 나뭇가지가 봄에 피울 봉오리를 마련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이 아파트에서 그걸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목련입니다. 저 목련은 가지가 저렇게 옆으로, 아래로 뻗어서 사람들 머리 위로 휘영청 하얀 꽃을 늘어뜨립니다. 이제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으면 저 목련이 꽃봉오리를 준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목련 같은 것들에게는 정치도 없고, 무슨 철학, 교육, 문학, 윤리, 종교 같은 것도 없이 순하게 아름답게 피어나고 그.. 2023. 12. 30.
‘어떻게’를 잃고 ‘무엇’에 빠져버린 교육 여기 대학 진학을 절체절명의 목표로 하는 한 고등학생이 있다. 놀기 좋아하지만 영리한 학생을 떠올려도 좋고 기억력은 그저 그래도 성실의 표본인 경우도 좋고 붙잡고 앉아 일일이 설명해주고 닦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여도 좋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성적이 좋지 않은데도 대학에 꼭 진학하고 싶어 하고 실패하면 실의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는 것만 전제하면 된다. 이 학생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① 지금부터 학교 공부에 열중한다, ② 조밀한 학습계획을 세워 자기 주도적으로 실천한다, ③ 경험 많은 가정교사를 채용한다, ④ 학원에 더 ‘투자’하고 수면 시간을 줄인다, ⑤ 학교공부, 학원 다니기, EBS 청취 등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한다, 등등 예시가 신통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우리 교.. 2023. 12. 29.
'헤아릴 수 없는 천국' '우주'universe라는 용어는 지금까지 관측되었거나 앞으로 관측될 모든 은하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모든 천체와 우주적 경이의 총체다. 1920년대만 해도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별이 우리 은하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수십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보면 아주 깜찍한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수십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면서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 생각을 '아주 깜찍한 생각'이었다고 표현한 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깜찍한 녀석' '깜찍한 놈'이라고 할 때의 그 '깜찍한'. 2014년 9월,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가 속한 은하군의 너비가 5억 광.. 2023. 12. 28.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30년 종교전쟁(1618~1648) 때, '억척어멈'이라 불리는 종군주보(從軍酒保) 마차 주인 안나 피얼링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큰아들 아일립, 작은아들 슈바이처카스를 잃고 마침내 자신도 위험에 처했으나 벙어리 딸 카트린이 목숨을 바쳐 북을 울림으로써 억척어멈 자신은 목숨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군목과 취사병을 이용하기는 해도 그들의 유혹과 술수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대사 속에 전쟁의 참상과 그 의미가 다 들어 있다(예). 억척어멈 (...) 용병대장이나 왕이 아주 미련해 부하들을 똥통으로 몰아넣으면 부하들은 결사적인 용맹성을 지녀야 하지, 그리고 덕목도 있어야 하고. 그 자가 인색해서 병사를 너무 적게.. 2023. 12. 27.
어처구니없음 그리고 후회 지난 23일,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텅 빈'(소엽)이란 에세이를 보았다. 곱게 비질을 해 둔 절 마당으로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그 고운 마당을 다시 걸어 나오며 마음을 비우는 데는 빗자루도 필요 없다는 걸 생각했다는, 짧고도 아름다운 글이었다. 문득 일본의 어느 사찰에서 곱게 빗질을 한 흔적이 있는 마당을 보았던 일이 생각나더라는 댓글을 썼는데 그 끝에 조선의 문인 이양연의 시 '야설(野雪)'을 언급했더니 카페지기 설목(雪木)이 보고, 이미 알고 있는 시인 걸 확인하려고 그랬겠지만, 그 시를 보고 싶다고 했다. '쥐불놀이'라는 사람은, 카페 주인 설목이 견제할 때까지 저렇게 세 번에 걸쳐 나에게 '도전'을 해왔는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더욱 그래서 답을 할 .. 2023. 12. 26.
새의 뼈 몇 개 달린 블루베리를 직박구리에게 빼앗기고 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어설픈 방조망을 설치했더니 영리한 그 녀석들이 그 아래로 기어들어가 새로 익은 열매들을 또 실컷 따먹고 이번에는 그 방조망을 헤치고 나오질 못해 기진맥진할 때까지 퍼드덕거리다가 지쳐 쓰러진 걸 보게 되었다. 직박구리들은 블루베리뿐만 아니라 벗지, 살구, 앵두, 대추, 보리수 열매... 달착지근한 건 뭐든 남겨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심은 나무 열매는 내 계산으로는 내 것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내 계산만으로 일방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그 녀석이 지쳐 쓰러졌거나 말거나 그냥 둘 수는 없으므로 일단 살려 놓고 보자 싶어서 방조망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더니 그럴 기력은 남아 있었던지 제.. 2023. 12. 25.
거기도 눈이 왔습니까? 일전에 L 시인이 올해는 첫눈이 자꾸 내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또 눈이 내렸습니다. 해가 중천에 올라온 것이 눈구름의 배경처럼 다 보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눈은 줄곧 내렸고, 한때 펑펑 퍼부어 오늘 오기로 한 친구에게 점심약속을 미루자고 전화를 할까, 하다가 조금만 조금만 하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눈은 그쳤는데 오늘 밤에 또 내린다고 했습니다. 어딘가 폭설이 내릴 거라는 예보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의 일들이 자주 떠오릅니다. 내 친구는 점심을 먹으며 그게 일과가 되었다고 이야기해 놓고 조금 있다가 또 그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누구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꾸하면서도 애써서 노년의 의미를 찾은 시몬 드 보부아르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회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그.. 2023. 12. 24.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매키스는 노상강도 두목인데다가 '거지들의 친구' 대표(사장) 피첨의 딸 폴리를 유혹하고 전격적으로 결혼까지 해서 적이 되었지만, 오랜 친구인 경찰청장 브라운의 힘으로 무법자처럼 지낸다. 그러나 정부 중 한 명인 선술집 제니의 배신으로 결국 체포되어 교수대로 보내졌는데 처형 직전 여왕의 사신이 나타나 석방된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의 구출을 하필이면 피첨(매키스의 장인)이 예고하는데, 이러한 극적 전개가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이 아니라 환희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피첨이 노래한다.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매키스 씨가 교수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기독교 아래에서 인간의 어떤 죄도 사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 2023. 12. 24.
강추위 엄청나게 춥습니다. 아예 밖에 나가기가 싫고, 지난해 초겨울 눈 많이 왔을 때 젊은이처럼 걸어가다가 미끄러져서 손목에 금이 갔던 일이 자꾸 떠올라 조심스럽고 두렵습니다. 이렇게 들어앉아만 있으니까 거의 늘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뭔가 불안한 느낌도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심할 때는 잠시 정신과 생각도 했습니다. 12월에 이렇게 추운 건 드물었지 않습니까? 설마 올겨울 내내 이런 식이진 않겠지요? 혹 2024년 1, 2월 내내 기온이 이 정도로 내려가진 않고 좀 춥다가 말다가 하며 그럭저럭 겨울의 끝에 이르고 슬며시 새봄이 오면 이번 겨울은 '에이, 실없는 겨울이었네!' 하고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조심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전 잘 있습니다. 뭐든 '와장창!' 무너지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요. 2023.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