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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41

사랑하는 선중에게 벌써 5월이구나 담임선생님이 좀 무섭다고 하더니 선생님께서 네가 좋은 아이인 걸 알아보시고, 너도 선생님을 좋아하며 지내니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처음에 좀 무섭게 보이는 선생님이 알고 보면 마음씨가 곱고 열정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만난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인 것 같구나. 그러고 보면 너는 언제나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있으니 그 복이 많은 아이가 분명하다. 나는 네가 어째 좀 야윈 것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된다.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면 다른 일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을 보면 나를 닮은 것 같아서 그게 고맙기도 하지만, '옛날의 나처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저렇게 야윈 것인가?’ 싶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성격이 그러면 나중에 몸은 약질이 되고, 나이가 들.. 2012. 5. 3.
보고 싶은 선중에게 보고 싶은 선중에게 선중아. 이제 2월 하순이니까 곧 3월이 오고 그러면 네가 드디어 5학년이 되는구나. 5학년이 되면 어떻게 지낼지 그런 생각 좀 해봤겠지. 나는 우리 선중이가 건강하게 지내면서 4학년 때처럼 선생님과 마음이 맞고, 반 아이들과 잘 지내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구나. 5.. 2012. 2. 24.
적막한 세상 -퇴임을 앞둔 교장선생님께 Ⅱ 지난번 편지 보시고 많이 불편하셨지요? 섭섭해 하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다 퇴임하신 후에 덜 섭섭해 하시고, 덜 실망하시고, 마음 덜 아프시도록 하기 위해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퇴임하시면 그 순간 세상이 적막해집니다. 얼마 만큼이냐 하면 예상하신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해집니다. 오죽하면 저 자신은 현직에 있을 때의 그 세월을 '이승'이라 여기고, 지금의 이 세상을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상으로 여기고 있겠습니까? 원래 세상은 이처럼 조용하고 적막한 곳인데 우리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나기만 하면 교장선생님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그 여러 사람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는 기억 속의 인물들로 변하기 때문에 그런 .. 2012. 2. 4.
연상되는 단어들 사랑, 존경, 평안, 눈부심, 경이, 그리움, 뿌듯함, 설렘, 경지(境地), 대지(大地), 따뜻함, 웃음, 자랑스러움, 뜨거운 심장. 선생님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단어들이에요. 렘, 경지(境地), 대지(大地), 따뜻함, 웃음, 자랑스러움, 뜨거운 심장 선생님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단어들이에요. 2012. 2. 3.
교장실 비우기 -퇴임을 앞둔 교장선생님께 Ⅰ 교장실은 비우셨습니까? 아직 1월이니까 한 달이나 남았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얼른 비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며칠 남겨 놓고 허둥지둥 하지 마시고 마지막 날 빈손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별것도 아닌데 담아보면 여러 박스가 되고, 펴보면 별것도 아닌데 교직원들이나 학부모들이 보면 '뭘 저렇게 가지고 갈까?' 의아해할 수도 있습니다. 댁에서도 '이런 걸 뭐하려고 가지고 오나……' 할 수 있으니까 기념패, 감사패 같은 건 웬만하면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가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까짓 거 진열해 놓아 봐도 퇴임하면 봐 줄 사람도 없고, 마음이 허전한 사람이나 그런 것 너절하게 늘어놓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직생활 몇 년째입니까? 40년? 41년? 42년? 생각하면 '내.. 2012. 1. 28.
내게 인디언 이름을 붙여준 그 아이 책을 참 많이 읽는 여자애였습니다. 그 학교 도서실의 책은 거의 다 읽어버리고 교장실로 나를 찾아와서 새책 좀 많이 사면 좋겠다고 한 아이입니다. 어떤 종류가 좋겠는지 물었더니 문학은 기본으로 치고 역사, 과학 같은 것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조용하고, 오랫동안 “언제까지라도 멍하니 있고 싶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라는 부제가 붙은 블로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2007년 어느 봄날, 내게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습니다. ♬ "교장선생님 같은 분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우리 교육을 걱정하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자주 안부 전하겠다고 굳게 약속하던 선생님들도 생각나지만, 그들의 그 언약은 부질없다는 것을, 사실은 약속을 받아주던 그 순간에도.. 2012. 1. 12.
가을엽서 11 강원도 어느 곳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가을'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잠시라도 떠나는 시간에는 떠나는 그 곳을 눈여겨 봅니다. '꼭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젊은날에는, 아니 연전(年前)에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지 못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보고 싶겠습니까. 2011. 10. 20.
A 선생님의 여가 그곳도 덥다고 TV가 알려줬어요 이곳도 덥지만, 그곳도 덥다고 텔레비전이 연일 전해주고 있어요.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랄게요. 전 방금 천장형 에어컨 필터를 씻어서 말려 두고 손 씻고 와서 메일 쓰고 있어요. 아가들은 체육 수업하러 갔구요. 며칠 전, 체육 시간에는 천장의 선풍기 날.. 2011. 6. 24.
A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A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 A 선생님. 많이 지친 것 같습니다. 몸보다 먼저 마음을 쉬게 해야 합니다. 그게 사실은 어렵습니다. 나도 정년퇴직까지 했으면서도 자꾸 욕심을 내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옥학교 프로그램은, 나도 봤으면 싶었습니다. 프로그램 소개만 읽고 ‘언.. 2011. 6. 5.
A 교사의 갈등 A 교사의 갈등 선생님. 5월, 한 달 내내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이 있더니 오늘은 기어코 눈에 충혈이 일어나고 뿌옇게 흐려 있습니다. 몹시도 피곤하다고 몸이 먼저 말을 해오나 봅니다. 쉬어야겠는데, 참 쉬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고, 맘은 천근만근, 몸도 천근만근… 따갑고 흐려진 .. 2011. 6. 3.
K 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K 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K. 힘들어서 술을 반 병이나 해치웠다고? 아주 한 병을 다 '해치우지' 그랬어요? 1990년대 초 혼자 3년간을 지낸 사당동 그 이층 셋집에서 밤이면 교과서에 넣을 지도를 수작업으로 그린 적이 있어요. 그 숱한 밤에 아껴 두었던 여러 병의 술을 모두 '해치웠었지요'. 컴퓨터가 아니라 로터링펜을 쥐고 제도에 관한 아무런 도구도 없이 지도를 그린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싫은 고된 작업이죠. 내가 지도를 그리지 않아도 교과서는 나왔겠지만, "아이들에겐 바로 이런 지도를 보여줘야 한다"며 그 지도들을 구상하고, 수많은 선, 기호를 그려넣고, 색깔을 정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서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껴요. 누가 그걸 알겠어요? 알아주기나 하겠어요? K의.. 2011. 5. 20.
K 교사의 봄편지 선생님. 자정이 지났습니다. 술도 반 병 해치웠습니다. 치고받고 싸운 두 녀석 부모 만나 중재하고, 한쪽은 한부모 가정의 엄마라서 우는 걸 달래고, 다른쪽은 지역 유지라 그 아이가 다른 애를 때려 놓았는데도 "요즘 아이들 폭력성 운운" 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어야 하는 짓을 했습니다. 하도 속상하고 가슴 답답해서 외부 사람 만나서 교장샘 욕, 아그들 욕 실컷 했습니다. 까짓것, 저거도 막 나가는데, 나도 막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운동회 무용, 우리 학년엔 후배들뿐이어서 제가 자원한 다음, 2주 넘게 음악줄넘기 연수 받고 동영상 찍고 음악 준비하고 난리쳤는데, 기어이 7080 코드인 부채춤을 하라고 강권하셔서 결국 애매한 부채춤 담당자 하나 더 생기고, 저는 그 음악줄넘기를 단체경기로 .. 2011.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