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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내게 인디언 이름을 붙여준 그 아이

by 답설재 2012. 1. 12.

책을 참 많이 읽는 여자애였습니다. 그 학교 도서실의 책은 거의 다 읽어버리고 교장실로 나를 찾아와서 새책 좀 많이 사면 좋겠다고 한 아이입니다. 어떤 종류가 좋겠는지 물었더니 문학은 기본으로 치고 역사, 과학 같은 것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조용하고, 오랫동안 “언제까지라도 멍하니 있고 싶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라는 부제가 붙은 블로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2007년 어느 봄날, 내게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습니다.

 

 

"교장선생님 같은 분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우리 교육을 걱정하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자주 안부 전하겠다고 굳게 약속하던 선생님들도 생각나지만, 그들의 그 언약은 부질없다는 것을, 사실은 약속을 받아주던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서둘러 무슨 모임 같은 걸 하나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면 언제든 만나면 되고, 만나지는 못해도 그리워해 준다면 좋은 일이지만 멋있거나 훌륭한 인물도 아닌 주제에 그런 걸 바란다는 건 어디 가당하기나 한 일이겠습니까.

 

나로서는 이 아이를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충분합니다.

"저는요, '생각하는 자작나무'예요." 무슨 얘기 끝에 그걸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이름도 지어줄 수 있겠니?"

"벌써 지어 놓았어요.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라고……."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일어서게 되고, 무언가 조금만 더 이야기한 다음에 그만두고 싶고, 그러면서 살아 있는 표시를 하며 지내는 건,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가슴속에 그런 '주문(注文 혹은 呪文)'들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은 확실하다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하루하루 그런 주문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지내는 건 아니지만, 이런 엽서를 받으면 그날 그 이름을 받던 그 순간과 그때 그 아이의 표정과 우리의 분위기가 내 기억과 추억 속에서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자작나무', 그 아이가 그립습니다.

그 아이는 이다음에 훌륭한 인물이 될 거라느니, 그따위 싱거운 말은 하기 싫습니다. 그 애 담임도, 부모도 누군지 모릅니다. 그건 그때도 몰랐습니다.

다만,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겉으로라도 나를 좋아한다고 해줄 사람이 없게 되었지만, 그 아이만큼은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 아이가 그립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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