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A 선생님의 여가

by 답설재 2011. 6. 24.

 

 

 

그곳도 덥다고 TV가 알려줬어요

 

 

 

  이곳도 덥지만, 그곳도 덥다고 텔레비전이 연일 전해주고 있어요.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랄게요.

  전 방금 천장형 에어컨 필터를 씻어서 말려 두고 손 씻고 와서 메일 쓰고 있어요.

  아가들은 체육 수업하러 갔구요.

  며칠 전, 체육 시간에는 천장의 선풍기 날개 4개를 씻었더랬죠. 말린 후, 뚜껑을 다시 닫고 잠금쇠 잠그느라 목 젖힌 채 끙끙거리다 통증에 한참 시달리기도 했지요.

 

  어제 저녁 9시 뉴스에, 어느 초등 여교사가 명품 가방과 천여만 원의 뇌물을 받아 직위해제(?)되었다는 소식이 나오는 걸 보고 기가 막혔는데, 그 소식을 들은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마 오늘 하루만은 저 같은 초등학교 교사들을 싸잡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 않겠나 싶어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은, 학기 초에 학교 일에 번거롭게 신경 쓸 것 없다고 못 박은 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학부모들에게 이제 와서 도저히 협조를 구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런 시간마다 혼자 낑낑거리며 선풍기며 에어컨을 닦는 게 참모습인데, 오늘 하루 사람들은 초등 교사들을 얼마나 씹어대고 신랄하게 욕할 것인지…… 그 교사도 참 어지간하다 싶어서 살짝 원망이 되려 하네요.

 

  선생님의 블로그 보고 『시지프 신화』를 샀는데요. 초반을 읽고 덮어 둔 상태예요. 어려워서 속도가 붙질 않아요. 그 대신 『~니까~』를 읽고 있는데, 선생님 말씀마따나 이유식마냥 꼭꼭 씹어 놓아서 삼키기만 하면 되도록 써 놓은, 쉬워서 좋은, 재미있는, 쉽게 공감이 가는 글 같아요(『시지프 신화』랑 비교하면요).

 

  벨이 울려요.

  아직 하루의 초반이라 기분도, 기온도, 학교의 아침도

  싱그럽기만 해요.

  이런 시각에 메일 보낼 때도 있어야겠지요.^^

 

 

 

 

 

RE: 이곳도 덥고 비가 많이 내려요

 

 

 

 

  A 선생님.

  선생님께서 교과전담교사가 수업을 하는 시간에 천장형 에어콘 필터를 씻고 말렸다는 것도 뉴스가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 것이, 어느 철없는 학생이 담임교사에게 주먹질을 했다는 것처럼 뉴스가 되어야 당연합니다. 너무 팍팍한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게 뉴스가 되어야 우리나라 교사들의 업무가 정상화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에어컨 필터 청소하는 데는 전문성이 없고 차라리 젬병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날, 오늘 그 학교 교장선생님 같으면 "요즘 교장들이나 교사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그러실까요?

 

  명품 가방녀? 그런 여성에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까지 교사자격증을 준 교육부장관도 한심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그걸 나누어주다 보면 더러 희한한 경우도 섞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해야겠지요.

  학부모들도 '교사가 많으니까 명품 받고 쫓겨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하다가 아이들에게 얻어맞는 사람도 있구나' 그러겠지요.

 

  『~니까~』도 좋습니다. 더구나 그 책에서 위안을 얻는다면 좋은 게 분명합니다.

  책은 다 좋다고도 합니다. 그 나름대로 정보를 갖고 있으니까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뜻이겠지요. 아, 결코 그 책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D 선생님께 권하기로는(직접적으로 권한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면) 『시지프스 신화』도 좋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걸 다섯 번째로 읽고 있습니다. D 선생님이 그런 것처럼 어렵게 읽히기도 하고 번역이 잘못 되어 곰곰히 따져보며 읽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꾸 읽을수로 그 맛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니까~』라는 매혹적인 제목을 붙인 책을, 아예 볼 마음이 없게 된 것은, 그런 제목 붙이고 돈 받고 시간 빼앗는 책에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연히 그런 책을 멀리하겠습니까?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에겐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고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려놓는 책은 무조건 사지 않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내가 사지 않아도 사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 책을 얼른 다 읽고 『시지프스 신화』도 읽어보기 바랍니다. D 선생님은 특히 그걸 읽어야 합니다. 위안만 얻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시지프스처럼 무거운 짐(온 세상은 아니어도 교사로서의 그 한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도 흔들리지 않고 주저앉지 말고 굳건하게 걸어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별안간 떠오른 메일이 반가워서 당장 답장 합니다.

  이 여름이 D 선생님께 좋은 계절이기를 바랍니다.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인디언 이름을 붙여준 그 아이  (0) 2012.01.12
가을엽서 11  (0) 2011.10.20
A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0) 2011.06.05
A 교사의 갈등  (0) 2011.06.03
K 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0) 201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