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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K 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by 답설재 2011. 5. 20.

 

 

 

K 교사에게 보내는 답장

 

 

 

 

  K.

  힘들어서 술을 반 병이나 해치웠다고? 아주 한 병을 다 '해치우지' 그랬어요?

 

  1990년대 초 혼자 3년간을 지낸 사당동 그 이층 셋집에서 밤이면 교과서에 넣을 지도를 수작업으로 그린 적이 있어요. 그 숱한 밤에 아껴 두었던 여러 병의 술을 모두 '해치웠었지요'. 컴퓨터가 아니라 로터링펜을 쥐고 제도에 관한 아무런 도구도 없이 지도를 그린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싫은 고된 작업이죠. 내가 지도를 그리지 않아도 교과서는 나왔겠지만, "아이들에겐 바로 이런 지도를 보여줘야 한다"며 그 지도들을 구상하고, 수많은 선, 기호를 그려넣고, 색깔을 정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서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껴요. 누가 그걸 알겠어요? 알아주기나 하겠어요? K의 그 교사로서의 열병처럼. 그러니까 우리를 <무명의 교사>라고 한 것 아닐까요?

 

  K.

  잘 참았어요.

  사람들 중엔 돈을 많이 가지긴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 너무나 유치한 경우가 많아요. 한부모 가정이라고 서러워한 엄마도 의연하지 못했지만, 지역 유지라고 으스대는 사람과 그 녀석의 아내는 얼마나 유치했을지 짐작할 만해요. 그 사람들과 어우러져 지내는 교장도 유치하고, 그런 부모의 위세를 눈치챘을 아이들도 유치해지기 시작했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까짓거 K도 막 나가지 그랬어요? 헤집고 나서서 삿대질도 하고, 팔다리를 흔들며 고함이라도 치지 그랬어요?

  사실은 그래요. 여기서 그 상황을 그려보니까 그 유치한 사람들이나, 그렇게 나서진 않았지만 그걸 참는다고 표정 관리하며 중재한 K나(미안!) 다 유치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K가 좀 귀엽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그래, 그런 일도 없으면 살아가는 의미가 어디에 있고, 무슨 재미로 살겠나' 싶기도 해요. 그렇지 않아요?

  국가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그런 속에서도 교육을 해보자고 세금 내게 하고, 학교 세워 아이들 모으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한번 물어봐요. 그 으스대는 사람도 세금 낼 만큼 다 내고 국민된 도리를 하고 있어요. 어쩌면 그런 녀석이 더 '열정적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녀석' 중 한 명인지도 모르죠.

  우리나라 국민들이 언제, 대통령 말마따나 '인격'이나 '국격'이라는 걸 좀 높여보자고 노력한 적이 있었나요? 그저 '대학입학'뿐이었지요. 그러므로 아직 멀었고, 그 먼 길을 함께 하라고 K에게도 '교사자격증'을 준 것 아니겠어요?

 

  그리운 K.

  그렇게 힘들어하던 운동회가 지나갔죠?

  7080이 부채춤을 보고 싶어하듯이 3040(?)들은 신세대답게 음악줄넘기가 운동량도 많고, 아이들과 호흡 맞추기도 좋고, 세련된 엄마 아빠들에게 보여주기도 떳떳하겠죠.

  그렇지만 바꿔 생각해봐요. 그 부채춤 좋아하는 7080들은 이제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데, 서울 같으면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 아니면 그런 걸 볼 수가 없고, 이제 너도나도 다 패거리지어 삭막해지자고 작정을 했는지 초등학교 운동회 날 아니고는 구경할 수 없는 그 부채춤을, 나는 차라리 초등학교의 전통문화로 이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3040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한심한가요?

  더구나 이 한심한 사람은, 먼지가 폴폴 나는 운동장 건너편 화단 가, 심지어 교장실과 교무실, 화장실 옆에까지 펴놓은 돗자리에 김밥, 통닭튀김 펴놓고 모처럼 온가족이 아무 부끄럼이나 주저함 보이지 않고 모여앉는 그 정경까지 전통문화로 이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삭막해진 세상에, 그런데도 더욱 더 삭막해져 가는 세상에, 1년에 단 하루 그날만큼의 우스꽝스런, 촌스런, 그렇지만 참으로 마음 편한 전통문화라니! 혹 직장생활 때문에 담임선생님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죄많은 아빠'도 그날의 순간적인 면회로 가족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그 미안함을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겠어요?

  그 집 할머니는 또 7080의 부채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K.

  난 그랬어요. 내가 머물던 그 학교 선생님들께. "운동회 연습한다고 공부시간 까먹지 말라"고.

  그렇지만 사실은 아이들은 그렇지도 않아요.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지요. 얼핏 보면 음악줄넘기 연습, 부채춤 연습하며 지친 것처럼 보여도 운동회가 지나면 운동장에 나올 일이 별로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 어떤 선생님은 온갖 구실 다 붙여서 체육시간을 다른 시간으로 돌리기도 한다는 것… 아이들도 그런 것쯤 잘 눈치채고 있을걸요? 그러므로 좀 지친들 그것 또한 괜찮은 일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 참! 아이들 보고 "인간 쓰레기"라고 한 그 교장에겐 "당신도 이제 정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앞으로라도 말조심해요!"라고 해야겠군요. 에이, 형편없는 사람…… 정말 ㅇㅇㅇ 교장 아느냐고 물어보면 좋겠어요. 교장으로 지내는 5년 반 동안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 한번 찡그린 적 없다고 자부하는 교장, 청소 좀 잘 하라고 잔소리한 적도 없고, 좀 조용히 하라는 잔소리 한 번 한 적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그 ㅇㅇㅇ 교장 아느냐고.

  그렇지만 그가 내 앞에 나타나 "잘난 척하지 마세요. 선배님도 이러저러한 점은 잘못한 것 아닙니까?" 한다면, 그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게 걱정스러워요.

 

  그리운 K.

  사실은요,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내겐 그리움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얼마든지 오순도순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K부터 그런 순간들을 순하게 미소지으며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관리자는 저쪽을 보고 소리치지?” 그러지 말고, ‘나는 왜 저 관리자 쪽을 보고 생각하지 않고 내 방향을 따로 만들어 관리자와 다른 소리를 내고 싶어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생각해봐요. 아이들도 그러지 않겠어요? '왜 선생님은 내가 궁금해하는 걸 묻지도 않고 언제나 일방적으로 수업목표를 정하고, 게다가 <활동1> <활동2> <활동3>을 선생님 마음대로 정할까?' '그렇게 해놓고 30~4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그 방향으로만 일사불란하게 숨 가쁘게 몰아가는 걸까?'

 

  그리운 K.

  그런 생각을 하면 교사들은 관리자를 쳐다보지 말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해요. 관리자하고도 생각을 맞추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아이들과는 생각이 같아야 할 것 같아요. 관리자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언제나 옳고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가야 하는 것이 교사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교장은 그만두어야 하고, 그 교사는 다른 아이들을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요. 그 ‘다른 아이들’이 이 세상에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은 장난 좀 치고 싶어서,

  말썽 좀 부리고 싶어서,

  스트레스 좀 해소하고 싶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라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서,

  일단 어른들이 싫어하는 행동, 대통령이 준 임명장,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 주는 ‘자격증’을 가지고 학교에 와 있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해본 걸 가지고, 무슨 전쟁이나 일어난 것처럼 떠들어대는 교장이나 교사들을 아이들은 얼마나 가소롭게 여길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런 일도 없이 어떻게 초등학교를 떠나 중학교로 가겠어요? 아무 일도 없이 바로 앉으라면 바로 앉고, 숙제 하라면 숙제나 하고, 발표 하라고 할 때만 무언가를 지껄이다가 졸업한다면 나중에 어떤 일로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K.

  아이들은 참 아름답고 현명하다는 걸 알아요 해요.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럼에도 ‘자격증’ 가진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것들인지 깨달아야 해요.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앞에 세워놓고,

  그 손을 잡고 그 얼굴 쳐다보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이 나라 대한민국이 교사자격증을 가진 K에게만 부여해 준 '빛나는 특권'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그 특권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발휘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거나 누구와 다투거나 또 무슨 짓거리를 한다면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 줄을 알아야 해요.

 

  그리운 K.

  멋진 한 주가 다시 시작되기를 바랄게요.

  "선생님 은혜,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학교 앞을 지나가며 교문을 쳐다보면, 봄날은 너무나 찬란한데도 아무래도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내건 현수막은 아닌 것 같은 '스승의 날' 현수막이 썰렁하게 걸려 있는 풍경이 참 미안했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선배들이 다 망쳐 놓았다고 더 망쳐 놓자고 하겠어요? 그렇게 딱딱하지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새로 시작하는 한 주가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 아이들로서는 평생에 한번만 만나는 멋진 선생님으로 기억되기를 바랄게요.

  마치 <사랑의 학교> 그 소년소설 속의 1년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굴곡(屈曲)으로 수놓아지는 세월이 되도록 해주기를 바랄게요.

 

 

  K. ‘건투’를 빌게요. K의 사랑 속에서.

 

  추신 : 나도 K와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워요.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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