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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K 교사의 봄편지

by 답설재 2011. 5. 3.

 

 

 

선생님.

자정이 지났습니다. 술도 반 병 해치웠습니다.

 

치고받고 싸운 두 녀석 부모 만나 중재하고, 한쪽은 한부모 가정의 엄마라서 우는 걸 달래고, 다른쪽은 지역 유지라 그 아이가 다른 애를 때려 놓았는데도 "요즘 아이들 폭력성 운운" 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어야 하는 짓을 했습니다. 하도 속상하고 가슴 답답해서 외부 사람 만나서 교장샘 욕, 아그들 욕 실컷 했습니다. 까짓것, 저거도 막 나가는데, 나도 막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운동회 무용, 우리 학년엔 후배들뿐이어서 제가 자원한 다음, 2주 넘게 음악줄넘기 연수 받고 동영상 찍고 음악 준비하고 난리쳤는데, 기어이 7080 코드인 부채춤을 하라고 강권하셔서 결국 애매한 부채춤 담당자 하나 더 생기고, 저는 그 음악줄넘기를 단체경기로 하게 되었는데, 여차하면 그 따위로 하려고 큰소리 쳤느냐고 칼 맞을 지도 모를 상황까지 밀려서, 5교시와 6교시에도 연습하는데, 그 와중에 싸워서 한 놈이 병원에 다녀오고......

 

흑~ 정말 울고 싶습니다. 정말 속상합니다.

트랜드 못 읽고 고집 부리는 교장샘도 밉고, 멋대로 엇나가는 사춘기 녀석들도 밉고, 무능한 제 자신도 밉고, 숨 쉬는 것도 깜빡 잊게 되는 저주의 4월도 밉고, 그 4월에 우리와 무관하게 흐드러지게 피어서 순백의 살을 드러내고 잔인하게 웃는 저 봄꽃도 밉고, 그러므로 봄도 밉고, 다 다 밉습니다.

아! 작년의 어느 샘도 이런 증세를 가지고 우울증 진단 받고 병가 썼나 봐요. 그럼 저도 슬슬 서류 준비해서 가 볼까요?

안식월... 한 달 정도, 아가들, 학교, 확 버려두고 어디 갔다오면 정신이 마알갛게 닦여져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

저 교장샘한테 갈 뻔했어요. 혹시 우리 선생님을 아시냐고, 그분의 정년퇴임 때 모습과 교장샘의 정년퇴임의 모습은 너무 다르다고... 5,6학년 아그들에게 "인간쓰레기"라는 자극적인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무소불위의 교장샘, 여차 하면 강제퇴학 조치 뿐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꼬리표를 붙여 보내겠다는 등등.

우울한 봄날, 문득 학교 앞 큰 벚나무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던 퇴근 무렵, 아!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할 텐데, 내가 어찌 여기 이러고 있는 것인가 하던 자문에 대한 대답을 못했네요.

 

사랑하는 선생님.

사바의 중생이(기독교인이 웬 불교 용어? 요즘 저 본 정신이 아닌 관계로 종교도 넘나들고, 입에서 달변의 언어가 술술... 볼 만합니다.) 이리도 번민하고 있는 모습, 웃기지요?

선생님의 영혼에 저를 비춰볼 시간을 가지지 못한 병폐지요. 저음의 허스키로 어루만져 주시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여가가 없어서 찾아온 금단 현상이지요.

그나마 선생님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저는 훨씬 더 피폐해져 있을 거예요.

 

7월로 예정된 국가수준 평가가 자신의 근평과 직결된 교감샘은 시험지만 우리를 파묻을 양만큼 복사·등사해서 거의 시험지 푸는 기계로 취급하고 있고,

까짓것 퇴임하면 그 성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교장샘은, 마지막 운동회에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해 줄 부채춤을 시나리오에 넣지 않은 것이 괘씸하고, 엉뚱한 무용을 지도하는 제가 괘씸하고, 순순히 하라는 대로 안 하는 우리 멤버 전체가 괘씸해서 마구 날뛰시고....

 

선생님.

왜 저를 위로하셨어요?

왜 더 좋은 세상이 있고, 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어요?

왜 아무리 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저를 절망하고 좌절케 하셨어요?

 

저는 인간이 왜 요 모양일까요?

저는 왜 다른 자리도 아닌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걸까요?

올해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나고 있어서 갈 길이 너무 멀어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쳐서 쓰러지기 전에 선생님 한 번 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벚꽃비 맞으며 걸어 보셨어요?

건강 챙기시고 더욱 멋져지시고 더욱 사랑스러워지시길......

 

 

○○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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