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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교장실 비우기 -퇴임을 앞둔 교장선생님께 Ⅰ

by 답설재 2012. 1. 28.

 

 

교장실은 비우셨습니까?

 

아직 1월이니까 한 달이나 남았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얼른 비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며칠 남겨 놓고 허둥지둥 하지 마시고 마지막 날 빈손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별것도 아닌데 담아보면 여러 박스가 되고, 펴보면 별것도 아닌데 교직원들이나 학부모들이 보면 '뭘 저렇게 가지고 갈까?' 의아해할 수도 있습니다. 댁에서도 '이런 걸 뭐하려고 가지고 오나……' 할 수 있으니까 기념패, 감사패 같은 건 웬만하면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가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까짓 거 진열해 놓아 봐도 퇴임하면 봐 줄 사람도 없고, 마음이 허전한 사람이나 그런 것 너절하게 늘어놓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직생활 몇 년째입니까? 40년? 41년? 42년?

 

생각하면 '내가 이 나라 교육을 위해 그 오랜 세월 혼신을 바쳤구나!' 싶을 수도 있지만, 본인만 그렇지 다른 사람들이 뭘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감동하겠습니까? 혹 '오랫동안 잘 벌어먹고 살았구나' 하지나 않을까요?

'아, 이제 마쳤구나!' 하시면 그만이지 일부러 내세울 것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 마지막 출근을 하실 작정입니까?

2월 마지막 날 그날까지 출근하실 예정입니까? 말하자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렵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평소에 그만큼 해두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다음 학년도 계획을 잘 세우는지 하나하나 잘 살펴보고 후임 교장이 그대로 실천하면 되도록 해주실 작정입니까? 그게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교장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그러시는 게 혹 오히려 거추장스럽지는 않을까요?

정해 놓으신 그대로 시행할 후임 교장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아니, 후임자는 절대로 그대로 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대로 시행해야 합니까? 후임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아니, 대체로 선임자들보다 낫습니다. 그대로 하는 걸 좋아할 후임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그 이전에 마지막 출근을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어느 날, 혼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정하시고, 너무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교장실을 나서시면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모두들 나와서 마지막 퇴근하시는 모습을 보게 하는 건 서글플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퇴근할 때마다 "그럼, 내일 봅시다" 했습니다.

그럴 경우, 그다음 날에는 출근을 하지 않게 된 날, 그러니까 마지막 출근한 날은 퇴근하며 뭐라고 하겠습니까? 난처한 일 아닙니까? 그날 저는 행정실장에게만 "저, 갈게요" 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제가 퇴근하는 것에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제 마지막 인사를 받은 그 행정실장은 저의 그 마지막 인사를 알아챘을까요? "내일 봅시다"가 아닌 "저, 갈게요"였는데......

 

몇몇 교직원들에게 두고두고 만나 밥이나 먹으며 정을 나주자는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러지 않으시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왜 만나야 합니까? 두고두고 만나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까? 만나거나 연락을 하는 건 이유가 있을 때라야 합니다.

퇴임을 하시게 되면, 그들은 여전히 하루하루가 분주한데 교장 선생님만 한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교장 선생님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퇴임한 다음에도 학교 주변에 나타나는 분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어딘지 누추해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우리도 우리보다 먼저 퇴임한 분을 찾지 않았잖습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했습니까? 바빠서 그랬고, 꼭 만나야 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지 않습니까? 이제 학교에 남아 있는 그 교직원들은 우리처럼, 퇴임한 우리가 모르는 시간에조차 바쁠 것입니다.

 

나중에 혹 누가 "그동안 연락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면, 드디어 그는 개인적으로 교장 선생님께 연락을 할 이유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아, 서로 연락할 일이 있어야 연락하지요. 미안할 것 없습니다. 그래, 잘 지냈습니까? 혹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도와 줄 일도 거의 없습니다. '거의'라기보다 '전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주 만나야 정이 생기고 그 정이 변함없게 되고, 이미 정(情)이 너무 깊어졌으면 정기적으로 얼굴을 봐야 하고 함께 식사라도 해야 합니까?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까? 무슨 정이 그렇게 깊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후임자와 그 깊은 정을 주고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게 살아가는 이치이까요. 그게 인간이니까요. 더구나 그처럼 깊은 정을 주고받아야 할 사람이 자꾸 생겨서 드디어 너무 많아지는 것도 난처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보신 이런 얘기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너무 섭섭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저도 다 겪어보거나 확인하고 하는 이야기니까요.

사실은 저도 이런 얘기 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라도 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이런 얘기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부하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자부심입니다.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사라지는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혹 누가 있어 "교장선생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곧이 듣지 마십시오. 전 직원 회식 한 날 저녁에 2차, 3차, 노래방까지 따라간 교장을 좋아하는 교직원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아직은 교장 선생님께서 교장실에 계시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은 다릅니다!" "교장선생님은 특별합니다!" 그렇게 말해줄 뿐입니다. 그런 말을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해드리면 좋을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추신 : '너는 참 한심한 교장이었기 때문이야! 난 그렇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식당에서 몇 번은 옛 교직원들과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몇 년이 지나면 마침내 교장 선생님 역시 이런 이야기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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