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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적막한 세상 -퇴임을 앞둔 교장선생님께 Ⅱ

by 답설재 2012. 2. 4.

 

 

 

  지난번 편지 보시고 많이 불편하셨지요?

  섭섭해 하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다 퇴임하신 후에 덜 섭섭해 하시고, 덜 실망하시고, 마음 덜 아프시도록 하기 위해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퇴임하시면 그 순간 세상이 적막해집니다.

  얼마 만큼이냐 하면 예상하신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해집니다. 오죽하면 저 자신은 현직에 있을 때의 그 세월을 '이승'이라 여기고, 지금의 이 세상을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상으로 여기고 있겠습니까? 원래 세상은 이처럼 조용하고 적막한 곳인데 우리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나기만 하면 교장선생님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그 여러 사람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는 기억 속의 인물들로 변하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이젠 우리가 그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십니까? 잠깐 조용한 것 말고, 하루 종일, 아니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한 달, 봄 내내, 여름 내내, 그러다가 일 년, 이 년, 아니지요, 어쩌면 우리가 영영 사라지는 그날 그 순간까지 이렇게 적막할지도 모르므로 우선 그 적막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실지 생각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퇴임하시면 3월 1일부터는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교직원들이 그 일들에 대해 후임자와 연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그들은 교장선생님과 연락할 일이 전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교장선생님께서 그들에게 전화를 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그들은 한가한 전화나 받을 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할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교장선생님과 함께 생활할 때도 그렇게 지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전화기를 가까이 두시지 않아도 괜찮게 됩니다. 공연히 만지작거릴 일도 없고, 전화요금이 아주 적게 나와도 겸연쩍어하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할 일도 없어집니다.

  얼마만큼 없어지느냐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괜찮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가 없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얼 하든지 말든지 정말로 본인이 알아서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있어서 "이것 좀 해주십시오. 저것 좀 해주십시오" 하면 좋겠지만, 지금까지도 그러지 않았으므로 누가 감히 교장선생님께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다 뻔한 일이니까 남에게 바쁜 척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봤자 "아, 저분은 퇴임을 했는데도 바쁘게 지내는구나" 하고 곧이 들을 사람도 없거니와 퇴임한 사람이 바쁘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퇴임한 사람이 바쁜 척하면 이상한 사람,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누가 묻든지 이렇게 대답하며 지냅니다. "저는 이제 언제나 한가합니다." 그리고 분주한 척하거나 실제로 분주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구나! 구태여 왜 이럴까?'

 

  그러면 무얼 해야 합니까?

  그거야 말로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고급스런 활동을 하면서도 '참 한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별 것 아닌 일을 하면서도 '참 멋진 사람'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요전에는 요리학원을 다닌다는 분의 이야기도 들었고, 학교보안관을 하는 친구도 만났습니다. 어떤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골프를 치러 다니고, 어떤 이는 그렇게 국내외 여행을 합니다. 참 여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일일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좋아 죽겠다"는 표정인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는 마치 현직에 있을 때의 그 시간들을 늦게나마 혐오하는 듯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일만큼은 교장선생님 스스로 한다고 각오하시면 그것만 해도 하실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건강이 허락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연금(年金) 가지고는 도저히 여행을 일삼을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책을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 만 원 가지고 서점에 가면 이것저것 고르는 '사치(奢侈)'를 부릴 수도 있고, 특히 어차피 갈 길이라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나 가고 싶으므로 이 일이 참 좋은 건 분명합니다. 다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요즘은 책만 들면 졸음이 쏟아지니 시쳇말로 '환장할 일' '미칠 일'입니다.

 

  주제넘은 말씀도 드리겠습니다.

  무조건 "좋다"고 하시는 게 '좋습니다.' 교장선생님 의견이나 견해 아니어도 세상일이나 가정의 일이나 다 잘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는데 이제 와서 뭘 간섭하겠습니까?

  정말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야말로 정말입니다. 저는 그걸 방금,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중요하기도 하고, 이렇게 늦게 깨달은 것이 겸연쩍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내용이어서 밑줄을 쳤습니다.) 이제 와서라도 좀 성의를 보이겠다며 참견하는 것이야말로 다 헛일이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주제넘은 부탁이라는 걸 거듭 말씀드립니다.

 

  사는 날까지는 건강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것만큼은 경험해봐서 압니다. 아프게 되시면 좋아할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합니다. 현직에 계신다면 "아, 우리 교장이 아프면 결근이겠네?" 하고 좋아할 그런 사람이라도 있겠지만 이제는 정말로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또한 교장선생님이 아프시게 되면 깜짝 놀라고 걱정할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겨우 한 명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사시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지내시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런 이야기 털어놓고 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또 쓰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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