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6 바다에서의 죽음 그는 거의 새벽 2시까지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자동차의 문을 잠그고, 창문은 올려놓고, 불빛을 끄고, 라디에이터의 격자무늬가 절벽의 모서리 너머 텅 빈 공간으로 투사되게 해놓고서.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눈은 바다 표면이 호흡하는 것에, 즉 광대하지만 들떠 있는 거인이 잠을 자면서 악몽 때문에 주기적으로 깨어나는 것처럼, 계속해서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호흡에 매료되었다. 가끔 화가 난 광풍처럼 소리가 달아나 버렸다. 가끔 그것은 열에 들떠 헐떡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안선을 갉아먹고는 그들의 전리품을 가지고 멀리 후퇴하는, 밤 파도 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기저기 거품이 이는 잔 물결은 어두운 표면 위에서 반짝거렸다. 어떤 때에는 푸르스름한 우윳빛의 광선이 하늘 높이 별들 사이로,.. 2021. 2. 28. 나의 바다 내가 그에게 가서 울고 싶었을 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모든 걸 감추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때 그는 내가 울음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내가 내 얘기를 다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거절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다 아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을 때 그는 그의 너른 가슴을 보여주고 내 가슴을 찢어버리려고 해서 나는 얼른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생각과 움직임으로만 다가오고 웬만해선 말을 하진 않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늘 그를 생각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2020. 5. 27. 바닷가의 추억 1 1966년에는 아카시아 필 무렵에 시작해서 서울로 또 어디로 정처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정릉유원지에서는 물가의 돗자리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날마다 닭백숙을 시켜놓고 술을 마셨습니다. 나는 그곳 12호에서 1주일 알바로 500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내려오는 길의 어느 가게에서 닭백숙 없는 소주를 사 마시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일주일치 소주였는데 오백원은 괜찮은 수입이었지만 소주로는 몇 병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곳 어디에선가 영화 "돌지 않는 풍차"를 촬영하고 있었지 싶습니다. 초여름에는 대천으로 떠났습니다. 장항선 비둘기호 열차의 초록 의자가 선연히 떠오릅니다. 대천의 바다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표정이었고, 그 표정으로써 허접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내 가슴을 찢어놓을 것 같아서 두 손으로 그 터질.. 2019. 8. 31. 바다 냄새 그는 어머니가 단두대에서 참수된 그레브 광장에 갈 때도 있었다. 그 광장은 마치 커다란 혓바닥처럼 강 쪽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그는 광장에 눕거나 강가로 가 보거나 혹은 기둥에 매여 있는 배에 다가가서 석탄이나 곡식, 풀과 물에 젖은 밧줄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러면 서쪽으로 강을 가로막고 있는 이 도시의 숲 속 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바람은 시골 냄새, 뇌일리 부근 초원의 냄새, 생 제르맹과 베르사이유 궁전 사이에 있는 숲의 냄새, 루앙이나 카엥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의 냄새를 실어 왔다. 가끔 바다 냄새까지도 실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바다에서는 물과 소금, 그리고 차가운 햇살이 묻어 있는 돛단배 냄새가 났다. 바다 냄새는 단순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하고 독특한 냄새였기 때문에 그르.. 2017. 9. 5.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동천사 1994 Ⅰ 이생진 시인의 홈페이지 이름입니다. 거기에 가보면 언제라도 이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 「저 세상」 Ⅱ 토요일 오후 3시 30분. 영풍문고가 있던 자리의 분수대 앞에서 모이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일찌감치 나섰더니 '이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2시 30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 어디 찻집에라도 들어가 시간을 보내야 할까?'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을 보니까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헌책방이 눈에 띄었습니다. '옳지! 저기 숨으면 되겠구나.' Ⅲ 입구에서 안쪽까지 샅샅이 훑어가기로 했습니다. ― 한 권에 1,000원 ― 한 권에 2,.. 2015. 3. 23. 바다 추억 한겨울 아침나절의 해운대는 조용하고, 창 너머로는 따스하고 아늑했습니다. 가울가물하게 내려다보이는 백사장에서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이 사진을 찍으려고 아이를 얼르고 있었습니다. ♬ 독도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그 푸르른 흐름에서는 '힘'을 느꼈습니다. 무슨 낭만적인 것보다는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나는 그때, 편수관을 지내며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독도 의용수비대' 이야기를 실은 일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고, '저승에 있는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을 만난다 해도 고개를 들고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좀 건방진 생각도 했습니다. 그 독도의 풀 한 포기, 돌 한 조각도 소중하다는 느낌을 가지며 오르내린 것은 좋았지만, 이 나라 사람.. 2013. 2. 19.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