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66년에는 아카시아 필 무렵에 시작해서 서울로 또 어디로 정처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정릉유원지에서는 물가의 돗자리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날마다 닭백숙을 시켜놓고 술을 마셨습니다.
나는 그곳 12호에서 1주일 알바로 500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내려오는 길의 어느 가게에서 닭백숙 없는 소주를 사 마시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일주일치 소주였는데 오백원은 괜찮은 수입이었지만 소주로는 몇 병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곳 어디에선가 영화 "돌지 않는 풍차"를 촬영하고 있었지 싶습니다.
초여름에는 대천으로 떠났습니다.
장항선 비둘기호 열차의 초록 의자가 선연히 떠오릅니다.
대천의 바다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표정이었고, 그 표정으로써 허접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내 가슴을 찢어놓을 것 같아서 두 손으로 그 터질 듯한 가슴을 힘껏 부둥켜안은 채 한참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습니다.
2
밤이면 바닷가에 나가 앉아서 바다 소리를 들었습니다.
3
여름의 품은 무지막지하게 너른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그 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이 그 바닷가로 꾸역꾸역 몰려왔고, 갈 만한 바닷가는 해운대와 이곳밖에 없다며 김진규, 김지미 같은 배우들도 보였습니다. 카바레에서는 내 마음을 다 짐작하겠다는 듯 밤이 이슥하도록 쿵쾅거려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빈둥거려도 좋은 세상이었고, 그래서 또 견딜 만했습니다. 그런 낮, 그런 밤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도 까짓 것 마음이 편했습니다.
유독 쓸쓸함만은 여전했습니다. 마음 때문이었겠지요. 살아 있는 게로 만든 찌개를 먹었는데 토사곽란을 만났고, 이화여대에 다닌다는 여대생이 내내 누나라고 부르라고 종용했지만 치사하다 싶은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고, 빗속에 지프차 키를 잃어버려 쩔쩔매는 에스파냐 출신 병사를 도와줄 길이 없어 안타까웠고, 외벽을 모두 조개껍질로만 감싼 멋진 별장에서 서울 어느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의 과외를 맡았다가 '사과'를 '사과'라고 발음하지 못한다며 놀리는 바람에 당장 그만두었고, 나처럼 나돌아 다니는 어느 녀석과 어두컴컴한 창고 안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 상자 위에 올라가 밤이 이슥하도록 마시다가 그 '산더미' 위에서 잠이 든 새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내려간 그 녀석이 내 초라한 옷가지나 신발, 부끄러운 것들만 들어 있는 가방까지 다 갖고 달아났을 때의 재미있고도 난감한 시간도 있었고, 그러다가 홀연 여름이 지나가버린 그 이튿날 당장 가을이 닥쳤는데, 서울 사람들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는지, 이젠 바닷가 같은 건 염두에도 없었다는 듯 갑자기 그 바닷가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은 채 추적추적 비가 내리자 수천 수만의 엄지손톱만 한 게들이 우주 전쟁에 동원된 로봇 군사들처럼,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그러나 제각기 영차영차 뭍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내가 갈 곳은 어디인지 막막해서 또 울 것 같았습니다.
4
그 기억을 가슴에 묻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바닷가의 추억"이 들리기 시작했고, "바닷가의 추억"만 들리면 곧 그 바닷가의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바닷가의 추억"은 무슨 예약이나 해놓은 듯 여름만 되면 들렸고, 바닷가에만 가면 들려서 나의 바닷가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늘 쓸쓸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동네 저 하천변에서 '반딧불이 음악회'가 열린 날 첫곡 연주가 하필이면 "바닷가의 추억"이었습니다.
그 음악회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그렇지만 아무래도 별로 유명하지는 않을 듯한 저 음악인과 건반 앞에 앉은 여성, 단 두 명이 모든 곡을 다 연주했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바닷가의 추억"이라니, 이건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구나…… 나의 바다는 내 평생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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