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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나이7

말씀 낮추시지요 허리를 구부리고 뭘 좀 하고 있는데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럴 때 "예~"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게 불가능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달려가 울타리 사이로 내다봤더니 웬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이웃'이라고 했다. 반가워하며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불쑥 "전 올해 육십입니다. 자주 뵐 텐데 말씀 낮추시지요."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수가 있나. 응겁결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까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저도 너무나 좋습니다." 종일 생각했다. '아, 이거... 어쩌다가 육십 먹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됐지? 말을 놓으라니, 그런다고 덥석 말을 놓진 않겠지만 빈말이라도 그렇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난 이젠 정말 늙었나 보다. 이거 참...' 도대체 난 뭘.. 2024. 4. 7.
이 화려한 봄날의 앰뷸런스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어둠침침한 세상에서 계단을 올라섰을 때, 나는 이곳이 다른 세상인 줄 알았습니다. 이 삽상한 풍경이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거기 서! 그 자리에서 구경 좀 해.' 문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지속부에서부터 연주를 시작했는데, 몇 소절 전체에 걸쳐 그 소리만이 전경을 다 차지하며 들리다가 갑자기 그 트레몰로가 옆으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피터 더 호흐의 그림에서처럼 살짝 열린 문의 좁은 문틈으로 인하여 깊숙한 원경이 생기면서, 아주 멀리서, 벨벳처럼 부드럽게 비쳐드는 빛 속에서 어떤 다른 색조를 띠며, 그 소악절이 춤을 추듯, 목가풍으로, 중간에 끼워 넣은 삽화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인 양 나타났다. 빛은 참 좋은 것.. 2014. 6. 1.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아직도 짜증을 냅니다. 몸이 마음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주로 수양이 덜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한심한 수준이면서 남들이 하는 꼴을 부드럽게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반성을 합니다. '내가 왜 이럴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의 말씀을 찾아봤습니다. '예순이면 이순(耳順)이라는데…… 예순이 지난 지 옛날이고, 낼모레면 일흔인데……' ♣ 나는 열다섯에 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서고, 마흔에 不惑하고, 쉰에 天命을 알고, 예순에 耳順하고, 일흔에 하고싶은 바를 좇되 法度를 넘지 않았느니라. (孔子) 原文──爲政 四 子曰 『吾十有五에 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호라』 解義 …(전략)… .. 2013. 4. 24.
나에게 나이 한 살을 보내준 사람 나에게 나이 한 살을 보내준 사람 Ⅰ 임진년(壬辰年)이 되었습니다. 또 한 살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워낙 공평한 일이고, 불평할 일도 아니긴 합니다. 그럼 "이제 몇 살이냐?"고 물으면 어떤 숙녀분들처럼 그건 비밀이라며 능청을 떨고 .. 2012. 1. 24.
1970년대의 어느 날 1970년대의 어느 날 ♬ 1970년대 중반이나 후반의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분위기나 다 촌스럽습니다. 저 즈음엔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고, 힘들었고, 암울했으며, 살펴야 할 주변이 넓어서 지금 생각하면 정작 꼭 살폈어.. 2011. 9. 25.
나는 도대체 몇 살인가? 나는 얼마 전까지는 만 62세였고 생일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만 63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민등록상의 나이이고 사실은 만 63세였다가 지금은 만 64세입니다. 출생 신고가 한 해 늦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이로는 65세이니 올해의 내 나이는 무려 네 가지입니다. 좀 성가신 일이고 밝혀봐야 별 수도 없고 흥미도 없는 얘기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그 네 가지 중에서 적당히 가려 대답하고 있지만 만 64세(생일 전에는 63세)인 정확한 나이는 주로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공식적으로 써먹을 데는 없습니다. 애초에 면사무소에 등록된 1947년은 선친이 어떻게 신고한 것인지 한 해가 늦어진 것입니다. 그건 내가 병술(丙戌)생 개띠라는 걸로 알 수 있습니다. 생일도 음력인데 그 날짜가.. 2010. 11. 19.
세 월 (Ⅰ) : 나의 일생 살다 보니까, 산다는 것의 리듬이, 생각 없이 자고난 겨울날 새벽 창밖에 쌓인 눈의 경이로움 같은 것으로 느껴질 때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겨울이 와도 그만이고 가도 그만이고, 그래서 플라타너스 -가로등을 배경으로 서 있는 봄날 초저녁의 그 싱그러운 자태- 를 보아도 별로 생각나는 것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어느 날 이번에는 여름이 와도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산의 온갖 푸나무가 초록을 넘고 넘어 숨차도록 푸른데도 동해 - 그 그리운 바닷가에 갈 일이란 전혀 없어져버리고, 그 다음에는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는 거야 너무도 당연하여, 추억에 젖어 ‘사계(四季)’나 ‘무언가’(無言歌, 멘델스존) 그런 음악을 들어보는 일도 우습고 웬지 좀 부끄럽기도 하고 차라리 시시하게 .. 2008.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