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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화려한 봄날의 앰뷸런스

by 답설재 2014. 6. 1.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어둠침침한 세상에서 계단을 올라섰을 때, 나는 이곳이 다른 세상인 줄 알았습니다. 이 삽상한 풍경이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거기 서! 그 자리에서 구경 좀 해.'

문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지속부에서부터 연주를 시작했는데, 몇 소절 전체에 걸쳐 그 소리만이 전경을 다 차지하며 들리다가 갑자기 그 트레몰로가 옆으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피터 더 호흐의 그림에서처럼 살짝 열린 문의 좁은 문틈으로 인하여 깊숙한 원경이 생기면서, 아주 멀리서, 벨벳처럼 부드럽게 비쳐드는 빛 속에서 어떤 다른 색조를 띠며, 그 소악절이 춤을 추듯, 목가풍으로, 중간에 끼워 넣은 삽화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인 양 나타났다.

 

빛은 참 좋은 것이고, 봄은 그 봄볕 아래, 그리고 우리들 곁에서, 저렇게 변함없이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화려함은, 동시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가 저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쪽 건물 앞에 노란색 앰뷸런스가 서 있었습니다. 누가 많이 아파서 그 몸을 병원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연로한 환자이고, 자신이 머물던 저 아파트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가기 싫은 길일 수도 있고, 본인은 가는 줄도 모를 길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앰뷸런스 바로 옆에서 '아빠'가 아들에게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을 '아빠'가 '더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을 자신의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때로는 저렇게 한가롭게, 따뜻하게, 그렇게 살아가다가 나이가 들면 '결국은' 아니면 '불행하게도' 어느 날 병원으로 가게 되거나, 그 이전에 요양원으로 가서 한동안 피차 좀 '수월하게' 지내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제 집으로 들어올 때에는 전철역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일찍 들어오는데도 많이 피곤해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리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모자를 쓰고 게다가 마스크를 낀 채 손을 들면 그냥 지나가버리는 택시들이 많습니다. 미세먼지가 겁이 나서 마스크를 끼었지만 건강한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멀쩡한 날 그런 행색이라면 행패를 부릴 사람으로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얼른 마스크와 모자를 정리하고 손을 들었더니 택시가 바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택시의 기사는 한 손으로는 운전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파트로 가려면 약 1킬로미터까지는 직진이긴 하지만, 행선지를 말할 겨를도 없이 출발했기 때문에 좀 언짢아졌고, 이마트 앞을 지날 때는 짜증이 나서 요금 미터기를 가리키며 "이거 누르셔야죠?" 했더니 그제야 그걸 누르고 부랴부랴 통화도 끝냈습니다. 그때까지도 기사는 행선지를 묻지 않았는데 그걸 물을 경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다 정리되었을 때 물었습니다.

"뭐 때문에 그러시죠?"

"친구 아버지가 죽지를 않고 또 병원에 간다잖아요!"

내가 차를 탔을 때 통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행선지도 묻지 않고 미터기도 누르지 않은 채 한동안 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그 이상한 상황이 친구 아버지 때문이라는 듯 그 기사는 아주 크게 분개해서 참을 수 없었다는 듯 언성을 높였습니다.

"아니, 연세가 어떻게 됐는데요?"

"팔십이요! 팔십이나 됐어요. 이젠 죽어야지요!"

('저런! 팔십이라……') "……"

 

 

 

 

그 순간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주고받은 대화중에 그가 곁눈으로 나를 봤을까요? 사실은 나는 아직 팔십은 되지 않았는데…… 팔십이 되려면 몇 년은 더 있어도 되는데…… 그렇다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고, 몇 년은 더 살아도 괜찮은데, 그는 그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하기야 내가 염색을 하지도 않았고, 성형외과에 가서 몇 십만 원만 주면 간단히 해결해 줄 저승꽃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실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긴 하는 모양입니다. 전절에서도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사람이 나더러 어서 앉으라고 양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팔십이 되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고, 그러니까 눈치볼 것 없다고 말해 주면 그 기사는 마음이 편해질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도 적어도 육십은 되었을 것 같았고, 그러면 서로 인생은 참 잠깐이라는 말도 하게 될 것 같고,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 그러다보면 공연히 피차 서글픈 마음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고, 잠깐 참으면 헤어지게 될 텐데 초면에 뭐 그리 다정한 사이라고 그런 분위기까지 만들까 싶었던 것입니다.

 

 

 

 

까짓 거 어차피 가야할 길이고 다 가는 길이니까 차라리 이렇게 화려한 날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도 좋은 일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저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사람도, 내 짐작대로 나이든 분이라면, 혹 공교롭게도 그 택시 기사가 이야기한 그분이라면 차라리 나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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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2010년 2월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Marcel Proust, 김화영 옮김) 연재 제14회(225~248쪽) 중 240~241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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