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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2022/0927

맛있는 빵 사 갖고 가기 빵가게를 가려면 이 길로 내려오면 됩니다. 도서관 옆이니까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거기가 빵집입니다. 아주 작아서 세 사람만 들어가도, 그중에 좀 야단스러운 사람이 끼어 있으면 빵 구경하고 고르고 계산하고 하기가 순조롭지 못합니다. 그럼 슬그머니 나왔다가 조용할 때 다시 들어갑니다. 그렇게 작은 빵집은 언젠가 방송에서 전 세계적으로 제일 좋은 빵을 만드는 집인양 소개해서 우면동까지 찾아가 본, 빵맛이 너무나 형편없었던(그냥 밀가루 뭉친 듯한) 그 가게 말고는 처음입니다. 이 집은 고소한 빵만 만듭니다. 게다가 '계량제'와 '화학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천연발효종'(이게 뭐죠? 아마도 좋은 것)을 써서 통밀, 밀, 보리의 풍미와 식감을 살리고,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하며 만든다는 표지판을 보면(언젠.. 2022. 9. 16.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연인이었다고 해서 좀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엄청난 작가였다. 노인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고 그 문제는 단지 지배 계급들 내부에서만 제기되며(게다가 남자들), 19세기까지 '늙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노인들이 많지도 않았다.(121) 노년은 비참한 것이다. 노년에 대해 위안을 받기보다는 낙심을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라고나 할까?(152~153)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50세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나이에 달해야만 '프레노시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노시스란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신중한 지혜로, 체험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 2022. 9. 15.
안느 델베 《까미유 끌로델》 안느 델베 지음 《까미유 끌로델》 김명호 옮김, 정음사 1989(12판) 로댕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동안에는 하고 싶은 말이 흘러넘쳤는데 마주 앉았다고 생각하니까 몇 마디만 남은 느낌입니다. 오래 전 광화문의 한 갤러리에서 까미유의 작품을 보았는데 거기 귀하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듯합니다. '이것이구나, 이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지옥문'은 S그룹 건물에서 봤지요. 내내 잊히지 않은 작품은 귀하의 작품이 아니고 까미유의 '어린 소녀 샤틀렌느'입니다. 섭섭한가요? 나는 그 소녀의 표정과 눈빛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연히 떠오릅니다. 조각이 위대한 예술이라는 걸 그 작품을 보며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이 결코 귀하의 작품보.. 2022. 9. 14.
유다의 그리움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유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유다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예수를 부추겨 예루살렘에 이르게 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그만 그 곁을 떠나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직전입니다(405~406). 이 장면을 읽으며 모처럼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리움에 대해 소홀했습니다. 나는 얼굴이 곰보인 임신한 여종이 내 앞에 가져다준 고기 접시를 개 먹이로 식탁 밑에 내려놓았다. 포도주는 식탁 위에 그대로 남겨 놓았다. 난 일어서서 주머니에서 우리의 돈 꾸러미를 꺼냈고 일견 거칠다 싶은 동작으로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 젊은 여인의 품에 던져 주었다. 그렇게 .. 2022. 9. 13.
마티스 〈댄스〉 학교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서 본 듯도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할 때는 교과서에서 봤고 그 사진이 아주 작았다고 기억하지만 불분명합니다.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장을 할 때는 여러 번 봤습니다. 중고등학교 미술 검정 교과서 발행 허가를 전결하며 '여기도 있네' '이 책에도 있네' 했습니다. 오래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습니다. 잠시 '이런 그림이야 아이디어만 가지면 웬만한 사람은 그릴 수 있는 그림이지 않아?' '마티스가 그리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가 그렸겠지?' 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에게 마티스는 그런 화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우환 선생의 에세이를 읽고 아득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예술에 대해, 그림에 대해, 화가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최근에.. 2022. 9. 12.
영혼 ② 저 소 눈빛 좀 봐 내가 축사 앞에 서면 쳐다보기도 하고 설설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듯한 표정입니다. - 왜 들여다봐? - 심심한 것 같아서... - 왜 그렇게 생각해? - 거기 축사 안에서만 평생을 지내다가 가니까. (도살장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어렵다. 저들도 안다.) - 너희 인간들은 달라? 갇혀 살지 않아? - 글쎄, 우리는 멀리 여행도 가고... 그러잖아. 달나라에도 가잖아. - 그게 대단해? 속담에도 있잖아. 오십 보 백 보... - 오십 보 백 보...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네. 나는 저 어미소와 아기 소(송아지)도 바라봅니다. 어쩌면 저리도 다정할까요? 저 앉음새의 사랑 속에 온갖 사연이 다 들어 있겠지요? 나는 축사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자꾸 나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2022. 9. 11.
백석 「흰밤」 백석 /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그야말로 가을밤, 추석입니다. 온갖 것 괜찮고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오늘도 낮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자 16년째 쌓이던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지 오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습니다.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 2022. 9. 9.
'엉망진창 학예회' 안녕하세요, 선생님! 금요일 저녁에 언니 별서에서 보내고 함께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선생님 책 "가르쳐보고 알게 된 것들"이 와 있었습니다. 반가움에 맨 앞의 '엉망진창 학예회'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덮었습니다. 여운이 길었으니까요. 첫 이야기에 선생님의 교육 철학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색으로 보면 계룡산에서 본 무성한 녹색일 것입니다. 인연이 닿아 뵙게 되면 이 이야기만으로도 오랫동안 만났던 사람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교육 철학에 동의합니다.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늘 평안하시길 바라는 ○○○○ 드림. 2022. 9. 9.
영혼 ① 빵집 앞 강아지 빵집 앞에서 저 강아지가 네 박자로 짖고 있었습니다.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 나는 빵집을 나오자마자 바로 저 모습을 보았는데 강아지는 빵집을 향해 똑바로 서서 네 박자씩 줄기차게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유모차 안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 이 강아지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짖고 있을까? - 자신이 주인보다 윗길이라고 여기고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걸까?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당장 나오지 않고!" - 아니면? 애원조로? '제발 빨리 좀 나오세요. 부탁이에요~ 초조해 죽겠어요. ㅜㅜ'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짖는 모습이나 그 목청으로 보면 아무래도 "들어간 .. 2022. 9. 8.
조영수 동시집 《마술》 조영수 동시집 《마술》 그림 신문희, 청색종이 2018 책 중에서도 동시집을 읽는 저녁이 제일 좋았습니다. 그 시간이 선물 같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누구나 그렇다고, 선물 같다고 할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복잡하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동시집을 읽고 있으면 그 시간 아이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영수 동시집 《마술》을 읽으며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즐겁다 재미있다 밝다 맑다 가볍다 우울하지 않다 세상은 괜찮다 ..................... 이런 것들이 이 동시집을 읽는 동안의 느낌이었습니다. 아, 시라고 해서 굳이 무슨 운율 같은 걸 넣으려고 애쓰지 않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억지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욱더 .. 2022. 9. 7.
조것들을 죽여버리려는 것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복도 많지, 일곱 명이나 됩니다. 아, 여기 나무 아래에 뒤쳐진 아이 한 명을 데리고 가는 선생님도 보입니다. 두 분이 여덟 명을 보살피는 것 같습니다. 고물고물 움직이는 조것들에게 발길질을 해서 신문방송에 나온 선생님도 있습니다. 낮잠을 자지 않는다고 이불에 싸서 던져버리고 그 위에 무지무지하게 굵다란 그 넓적다리를 올려놓고 밥 먹는 아이 이마를 쥐어박아 넘어뜨리고... 아이가 모를 줄 압니까? 분명히 기억할 것입니다. 두고두고 생각하고 떠올릴 것입니다. '나는 그때 마녀와 지냈다고, 이 세상에는 실제로 마녀들이 있다고, 복수를 하고 싶다고...' 차라리 그렇게 기억하면 다행일 것입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는 자라서 자신도 모른 채, 영문도 모른 채 씩.. 2022. 9. 6.
누구를 위한 학제개편? (2022.8.26)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한 살 낮추는 학제 개편 논란으로 전 부총리겸교육부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물러났다. “제가 받은 교육의 혜택을 되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지만 많이 부족했다” “논란의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제 불찰이다” “우리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기원한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 이것으로 그 진정성을 보여주었지만 부총리 혹은 장관이라는 직책은 진정성만으로는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왈가왈부가 필요 없게 되었고 후임자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사퇴한 장관의 부산하던 기자회견장을 떠올리며 그런 고위직은 부처 직원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걸까,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단 며칠 만에 물러난 이번 경우에는 특별히 기억할만한 관계가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 같고 .. 2022.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