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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바라기 노리코 「이웃나라 말의 숲」

by 답설재 2012. 10. 29.

 

 

 

지난번에 「광화문의 독서상」(2012.10.18)에서 이야기한, 그 아름다운 처녀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봤더니 윤동주 시인의 「서시」였습니다. 그때 일본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가 이 시를 이야기한 것이 생각나서 얼른 책을 찾아봤습니다. 다행히 읽은 때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현대문학』 2012년 5월호, 320~323쪽).

 

☞ 「광화문의 독서상」https://blueletter01.tistory.com/7638114

 

 

 

 

이웃나라 말의 숲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のり子

 

 

숲의 깊이

가면 갈수록

뻗은 가지 엇갈려 교차하며 저 깊숙이

외국어의 숲은 울창하기만 하다

한낮 여전히 어두운 샛길 혼자 터벅터벅

栗(구리)은 밤

風(가제)은 바람

오바케(お化け)는 도깨비

蛇(헤비) 뱀

秘密(히미츠) 비밀

茸(기노코) 버섯

무서워 고와이(こわい)

 

첫머리 언저리에선

신명 나게 떠들어대었다

뭐든지 신기해

명석한 표음문자와 맑디맑은 울림에

히노 히카리(陽の光) 햇빛

우사기(うさぎ) 토끼

데타라메(でたらめ) 엉터리

愛(아이) 사랑

기라이(きらい) 싫어요

旅人(다비비토) 나그네

 

세계지도 위 이웃나라 조선국에 검디검도록 먹칠해가면서 이 가을바람 듣네.

타쿠보쿠의 명치 43년의 노래

일본어가 예전에 내차버렸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우려 해도 결코 지워 없애지 못한 한글

용서하십시오 유루시테쿠다사이(ゆるしてください)

땀 뚝뚝 흘리며 이번에는 이쪽이 배울 차례이지요

어떠한 나라의 언어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굳센 알타이어족의 하나의 정수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 싶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지요

 

왜놈의 말예末裔인 나는

긴장을 놓고 있으면

순식간에 한恨이 담긴 말에

잡아먹힐 듯한

그런 호랑이가 확실히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옛날 옛적 오랜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만의 즐거움

 

어딘가 멀리서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

노래

시침 딱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고

 

대사전을 베개 삼아 선잠을 청하면

"자네 들어오는 것이 너무 늦었어"라고

윤동주尹東柱가 다정하게 나무란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인

8월 15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겨우 반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교복을 입은 채

순결만을 동경하는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감연히 한국어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처롭습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인가를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조금도 웃어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 가다가 쓰러져 병들어도 싸리 핀 들녘

 

 

──『깊숙한 오솔길(おくの細道)』의 소라(曾良)의 노래

(『촌지』, 1982년)

 

 

 

다음은 이바라기 노리코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2006년 2월 17일 일본 최고의 여자 시인은 어느 누구도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히 영면했다.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처럼 일본의 근현대를 통틀어 경계선상의 삶, 아니 지성적이며 탈경계의 시적 삶을 영위한 시인이 달리 있을까. 시인의 사망이 확인된 얼마 후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가 직접 쓴 부고가 지인들에게 날아들었다.

 

이번에 저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적어둔 것입니다. 저의 의지로 장례·영결식 등 아무것도 치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으니 조의금이나 조화 등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되돌려보내는 무례만 거듭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도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그저 한순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께 받은 오랜 세월에 걸친 따뜻한 교류는 보이지 않는 보석과 같이 나의 가슴에 깊이 간직되어 환한 빛을 띠며 제 인생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주셨는지…… 깊이 감사 말씀 드리면서 이별의 말을 대신하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타계하기 전 시인이 준비한 세상과의 고별사를 친족이 일시와 병명을 채워 발송한 것이다. 세상과의 이별에서도 '기대지 않는다'는 이바라기 노리코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죽음에 있어서도 시상과 합일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바라기 노리코는 다시 한 번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더 이상

야합하는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야합하는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야합하는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로만 선들

무슨 불편이 있으랴

기댄다고 한다면

그저

의자 등받이뿐

 

──「기대지 말고」, 전문

 

 

『현대문학』 2012년 5월호, 329~330쪽, 양동국, 「지성·반골·탈경계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첫머리 부분입니다. 일본인 중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런 사람은 더 살아도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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