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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권이영 「분당일기 2」

by 답설재 2012. 11. 8.

분당일기 2

  

                                                                                                    권이영

  

 

아파트 앞 여기저기 모여 있는 그것들이

진달래도 철쭉도 아닌 연산홍임을 오늘에야 알았다

도장나무의 본명이 회양목이라는 사실도

가구 만드는 데 쓰는 주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오늘 알았다

평소에도 친절한 그 경비원이 가르쳐주었다

요즘 유난히 눈길을 끄는 그것들이 족두리풀이라는 것도 알았다

줄지어 선 그 나무들 앞에서 내가 머뭇거리자

측백나무도 모르셨느냐고 경비원이 웃었다

미안하다고, 부끄럽다고 마주 보고 웃었다

내친김에 모과나무 향나무 대추나무 목련 수국과도 새로 인사했다

나도 경비원도 모르는 나무가 있었다

경비원이 저기 오시는 분에게 물어보자고 하여

은발의 그 신사에게 실례지만 저 나무 이름을 아시냐고 물었더니

자기 고장에서는 떼똥나무라고 부른다고 의외로 대답이 빨랐다

서로 명함까지 건네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십 년 가까이 같은 동 같은 현관을 드나든 사이었다

──떼똥나무 덕분에 이웃 친구가 생겼네요, 하하!

──하하, 이제부터라도 종종 만납시다!

햇살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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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영 1941년 서울 출생. 1991년 『심상』 등단. 시집 『천천히 걷는 자유』.

 

 

 

 

『현대문학』 2011년 12월호(164~165쪽)에 실려 있습니다.

1990년대에 분당에 아파트 분양을 받으려고 했다가 떨어졌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분당은 아파트도 이렇게 따뜻하고 좋구나 싶어서입니다.

나도 분당에 여러 번 가봤는데?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저런 시인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면,

1990년대의 몇 년 간 참 구차하게 살던 곳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곳에 가서 다시 살아보라고 하면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사당동 전철역 근방이나,

가령 일산, 김포, 신림동, 잠실, 옥수동, 논현동 같은 곳도, 그러니까 서울이나 근교 어느 곳이라 해도 그곳에 권이영 시인 같은 이가 단 한 명만 살고 있다면, 저처럼 따뜻한 곳이 될 수 있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시인이 가령 「논현동 일기 3」을 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언젠가 어느 시인이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를 써서 자꾸 성북동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못견뎌 하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요즘은,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도 권이영 시인 같은 아름답고 멋있는 이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긴 그 40대 남자는 어느 대학교 미술 교수 아니면 성악 전공 교수가 아닐까 싶고, 평소 수수한 옷차림이지만 어딘지 품위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우수어린 표정이기도 한 그 아주머니, 날마다 거의 일정한 시각에 나오는 그분이 바로 시, 혹은 수필을 쓰는 문학가가 아닐까 싶고, 하여간 이 아파트에도 알고보면 유명한 분들이 몇 분은 있을 것 같아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괜히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지기도 하고, 자꾸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아파트는 어딘지 모르게 좀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들기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