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24

나는 허당이겠지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왜 사는가?' 생각합니다. 현직에 있을 땐 건방진 생각일지언정 신념, 자부심, 의무감, 책무성... 같은 단어를 곧잘 동원할 수 있을 만큼 힘차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이른 것인데 이제 내가 지금 왜 사는가 싶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아무도 내게 일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내 지식은 쓰레기가 된 것입니다. 그 '일' 말고는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가만있어 보세요... 운전을 해서 시장을 봐 올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요. 잔소리를 하는 쪽도 그렇고 듣는 쪽도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당장 그 방법을 따를 것입니다. 그 외에는? 쑥스럽긴 하지만 청소가 있습니다. 내가 청소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아.. 2021. 5. 8.
책 읽기 1 나는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내 책에 꽂혀 지냈고 이젠 책이나 읽으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책은 어느 분야를 정하고 집중적으로 읽어도 좋겠지만(그게 거의 당연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것저것 읽을 만하다 싶은 걸 종횡무진으로 읽어치워도(치우다니?) 세상의 책은 무궁무진하니까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 싶었습니다. 읽지 않는 사람이 보면 미쳤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부모는 두 분 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세상을 떠났고, 피붙이 중에는 그런 나를 가리켜 "책만 읽으면 뭐가 나온다더냐?" 하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 열정과 노력으로 다른 일을 했더라면...... 그 어떤 일을 했더라도 뭔가 얼마쯤의 성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성과 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2020. 11. 27.
책 버리기 책 버리기는 '사건'입니다. 잊혀도 상처는 남습니다. 함께하기가 어려워 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손수레로 세 차례 실어냈습니다. "어허! 죽을 때 가지고 가시지 왜 자꾸 버리세요?" 재활용품을 정리하던 경비원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듣고 있지 않을까 싶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저 꼴에 책을 읽는단 말이지?' 단 한 사람이라도 보게 되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 뻔합니다. 지난주에 내다버릴 땐 아뭇소리 않고 바라보기만 했었습니다. 순간 나도 덩달아 외쳤습니다. "벅차서요! 남아 있는 것도 다 가져가지 못하겠는걸요!" 정말 그걸 다 갖고 가라면 그 먼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을 건널 땐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경비원은 큰 소리로 웃기만 했습니다. "어~ .. 2019. 11. 7.
왕수이자오 《소동파 평전》 중국의 문호 소식蘇軾의 삶과 문학 《소동파 평전 蘇東坡評傳》 왕수이자오 지음 조규백 옮김, 돌베게 2013 1 '적벽부(赤壁賦)'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 적벽부를 읽으면 나도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읽게 된 적벽부는 나를 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임술년1 가을 음력 7월 16일에 소자蘇子가 손님과 더불어 배 띄우고 적벽 아래에서 노닐었네.(169) 그렇게 시작되는 그 긴 부(賦)의 어느 곳에서, 선친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 얘기를 듣던 육십여 년 전 어느 겨울밤을 그려보았습니다. (……) 진실로 일세의 영웅인데 지금은 어디 가고 없는가? 하물며 나와 그대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땔나무 하며 물고기 새우와 벗하고 고라니 사슴과 친구 삼아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표주박.. 2018. 12. 5.
책과 함께 있기 책과 함께 있기 라스코 동굴 벽화(부분) (…) 이렇게 많고 다양한 동물과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는 스케일의 그림을, 그것도 암흑 속에서 작은 등불 빛에만 의존하여 그렸다는 사실은 실로 믿기 어려운 위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의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2018. 10. 31.
"책에게" 알지 못하는 미지의 우르간다가 「재치있는 시골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책에게 책이여, 그대가 신중한 태도로 훌륭한 사람들 곁에 다가간다면 세상 물정 모르면서 우쭐대는 사람은 그대의 생각을 알지 못해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넘어가 매우 조급하게 다루어진다면 비록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짐짓 꾸밀지라도 그대는 이내 알게 될 것이오. 그가 정곡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18) 이롭지 못한 책을 많이 읽고 미쳐버린 라만차의 귀족에 대한 모험담을 그대여 들려주오.(19) 어리석은 책을 내면 끊임없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니.(20)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11, 초판 26쇄). '세상 물정 모르면서'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넘.. 2018. 9. 25.
여기 이 방에는 책이 없다 여기 이 방에는 책이 없다 여기 이 방에는 이젠 내가 읽을 만한 책이 없다. 내 책이 있는 곳,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2018. 5. 31.
정은숙 『책 사용법』 정은숙, 『책 사용법』(마음산책, 2010) 책은 대개 세 가지 방법으로 고릅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학생이 된 듯합니다. 다음은, 서평을 보고 고르는 경우입니다. 호기심으로 사 놓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속았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당장 읽지 못해서 쌓아 놓고 시간이 좀 흐르면 저절로 그걸 느끼게 됩니다. 그런 책들은, 읽지 못한 여러 권의 책들 사이에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충동구매를 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책을 사러 간 길에 표지나 목차를 보고 덥썩 사버린 책은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책은 다 좋다" "전화번호부라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좋다"는 무책임한, 혹은 따분한 경우는 '선정'의 경우가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은 충동구매를 한 책입니다. "책.. 2014. 2. 23.
『왜 책을 읽는가』 표지 그림에 끌려서 샀습니다. 모두들 열중하고 있고, 한 남성이 앞을 바라봅니다. 오만함이 느껴집니다. 방해 받았다면 그럴 수밖에. 지금 읽고 있던 곳의 책갈피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좀 못마땅한 듯한 표정입니다. '뭐야, 지금?' 저 사람에게 책을 읽는 것은 그런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모두들 혼자입니다. 그렇게 보면, 혼자 하는 일로서 독서만큼 적절하고, 비난 받을 일 없고("책이나 보면 뭐가 나온다더냐?"는 비난을 받은 사람이 없진 않지만), 마음 편하고, 자유롭고, 무엇보다도 재미있고("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 표지를 여러 번 들여다보았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표지의 이 말은 탐탁지 않습니다. '무슨, 그렇게, 이.. 2013. 10. 1.
책들의 유혹 책들의 유혹 '아…… 어떻게 하나?……' 여기가 지금 어딘지나 아는지…… Ⅰ 서점에 들어서면, 그게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건지 아니면 무슨 헤어나지 못할 최면술에나 걸리는 건지, 금방 다른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한 가지 일에 골똘하게 됩니다. '아,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2012. 9. 2.
책 냄새 '수석연구위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드나들고 있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은, 건물 5층에 이사장과 사무국장, 과장 등의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고, 4층은 '교과서정보관'입니다. 그 정보관 한쪽에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방을 드나들며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재단의 목적에 기여하고 있는가?' 교과서정보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특유의 '냄새'가 납니다. 책들이 품어내는 그 냄새를 '향기(香氣)'라고 하고 싶지만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향기라니……' 하고 터무니없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냄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에게는 싱싱한 빵 냄새나 담배의 향기(47년을 피우고 "끊어버린" 아, 그 담배!), 혹은 커피향처럼 언제나 좋기만 하고 싫증이 나지를 않는 냄새지만, 사무실을 .. 2012. 4. 30.
세 월(Ⅱ) 지나는 길의 개나리가 이야기합니다. "봐, 노랑이란 바로 이런 색이야." 누군가 모를 무덤가에는 진달래가 곱습니다. 멀리에서 복사꽃도 담홍색의 진수(眞髓)를 보여줍니다. 복사꽃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1960년대나 70년대의 그 정서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쩌다가 나만 이렇게 멀리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봄꽃들은 잎보다 먼저 피어나 곧 아지랑이 피어오를 봄을 ‘희망’만으로 이야기하지만, 나처럼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려는 사람에게는 T.S. 엘리엇의 말마따나 그 희망이 잔인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린애들이나 소년소녀들은 저 꽃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이란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얼굴이 무너지고 마음이나 정서도 그만큼 누추해져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래도.. 2008.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