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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장미의 이름8

두려움 소설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에서 교황 요한 22세의 사절단장 베르나르 기가 황제의 사절단 일행,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 혐의로 수도사 레미지오를 문초하는 장면은 584쪽에서 617쪽까지이다. 이 34쪽을 단숨에 읽었다. 두려웠다. 이른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아무리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해도 교황이라는 사람의 '바로 아래'에서 혹은 '옆'에서 하느님을 입에 달고 살아갔을 고위 성직자가, 이렇게 잔인하고 악독할 수도 있을까? 혹 그런 직위에 있으면 하느님이 '있으나 마나' 하다는 걸 훤하게 알아서 두려움 같은 게 사라지는 걸까? 아니, 이건 소설이지? 그럼 움베르토 에코의 마음속에 이런 잔인함, 악독함이 스며 있었던 걸까?…… 나는 성.. 2023. 7. 9.
나이듦 : 알고자 하던 지성, 행하려던 의지가 부질없어 보인다 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은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 바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성미가 불칼 같고 젊은이 뺨치게 혈기방장한 이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이 험한 모험의 가시밭길이었다. 어쩌면 우베르티노는 성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굳센 믿음의 값을 한 자리 성위(聖位)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23. 6. 27.
서책은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고대의 전도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일각수의 참모습을 계시받았던 것입니까?」 「계시라는 말보다는 경험이라는 말이 좋겠다. 설마 그러기야 했겠느냐? 어쩌다 보니 일각수가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일각수가 그때에 맞추어 우리 땅에 살거나 했을 테지.」 「그럼 우리가 어떻게 고대의 지혜를 믿을 수 있습니까? 멋대로 해석된 엉터리 서책을 통해 전수되어 왔을 법한 것을 어떻게 지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의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서책의 뜻은 우리에게, 일각수는 도덕적 진실, 비유.. 2023. 6. 25.
서책끼리 주고 받는 대화 「(……)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른 서책을 읽든지 하면서…….」 「다른 서책을 읽으시다니요? 다른 서책이 사부님께 도움을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서책이라는 것은 긴 줄에 꿰어 있는 것 같은 물건이거든. 종종 이 서책의 이야기와 저 서책의 이야기는 이어져 있는 수도 있다. 무해한 서책은 씨앗과 같아서 불온한 서책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불연(不然)이면 무해한 서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 독초 대궁이에 단 열매가 열리는 격이라고 할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을 읽어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으면 아베로에스가 뭐라고 했는지도 알 수 있고…….」 「과연 그러하겠.. 2023. 6. 21.
수학이란 무엇인가? 하필 수학 공부가 싫다고 할 때(수학이란 본래 그런 공부인지 알 수는 없고, 수학 교육은 아이들이 너무 많이 혹은 지나치게 수학을 좋아할까 봐 일부러 따분하게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런 얘기가 있지" 하고 소개해 주었더라면 싶은 이야기가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 수련사가 수도원 본관에 있는 장서관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몰래 잠입하고서도 우왕좌왕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이런 장면도 있다. 바늘자석 이야기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이다(347). 「사부님, 그럼 가시지요. 세베리노에게는 그 기적의 돌이 있습니다. 이제 물과 물그릇과 전피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흥분에서 떠들었다. 사부님은 내 어깨를 낚아챘다. 「가만……. 까닭을 모르겠다만, 나는 이 도구.. 2023. 5. 22.
움베르토 에코(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하)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하)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 '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이레간의 이야기 중 제4일부터 제7일까지의 이야기다.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살인사건은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과정이었고 40년간 그 수도원을 지배해 온 늙은 장님 수도사 호르헤가 세상에 유일본으로 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에 맹독(猛毒)을 묻혀 놓은 결과였다. 윌리엄 수도사가 흉계를 밝히게 되자 호르헤는 그 책을 불태워버리려고 했고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장서관이 불타게 되고 그 화재가 번져 수도원이 전소되고 만다. 윌리엄 수도사와 수련사 아드소 간의 대화.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가짜 그리스도 올 날이 임박했다. 이제는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 2023. 5. 13.
움베르토 에코(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상)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상)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이 소설을 읽으며 움베르토 에코에게는 박학다식이란 말이 무색하다는 걸 실감했다. 수련사 아드소가 사부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 '그 수도원'에 도착한 이래 이레간 벌어진 일 중 사흘간 벌어진 일을 적은 것이 이 책 상권이다.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에게 살인 사건의 전말을 수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장서관 출입만은 통제하는데, 살인 사건은 연이어 두 차례나 더 일어난다. 추리소설이니까 (하)권을 읽어야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건 독자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고, 사실은 움베르토 에코가 중세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갈등과 역사를 소재로 종횡무진 자신의 어마어마한 지식과 .. 2023. 5. 11.
지옥 예습 "너 그러다 지옥 간다" '나는 아무래도 지옥이나 가겠지?' 할 때의 지옥은 어떤 곳인지 어디에 공식적·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밝혀놓은 곳은 없다.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살아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악한 귀신이 되어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통이 정말 막심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감옥에 가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뿐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상)에서 지옥을 다음과 같이 그려놓았다. 딴에는 사람들이 치를 떨도록 하려고 온갖 짐승들의 모습을 총동원해서 지옥에 간 인간을 괴롭히는 장면을 설정했는데 나는 이 장면을 다 읽고 나서도 '아! 이건 정말 무서운데?' 하고 치를 떨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누가 진짜 극도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지옥을 그.. 2022.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