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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서책은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by 답설재 2023. 6. 25.

 

 

 

 

「고대의 전도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일각수의 참모습을 계시받았던 것입니까?」

「계시라는 말보다는 경험이라는 말이 좋겠다. 설마 그러기야 했겠느냐? 어쩌다 보니 일각수가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일각수가 그때에 맞추어 우리 땅에 살거나 했을 테지.

「그럼 우리가 어떻게 고대의 지혜를 믿을 수 있습니까? 멋대로 해석된 엉터리 서책을 통해 전수되어 왔을 법한 것을 어떻게 지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의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서책의 뜻은 우리에게, 일각수는 도덕적 진실, 비유적 진실, 우화적 진실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순결이 고결한 미덕이듯이, 이 서책이 드러내는 의미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진실을 지지하는 언어적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 이러한 표현을 부여했는지를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가령 서책에는, 금강석은 숫양의 피에만 녹는다고 써져 있다. 내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께서 는 벌써 이 진술이 틀린 진술이라고 하신 바 있다. 실제로 해보셨더니 안되더라는 게다. 그러나 금강석과 숫양의 피 사이에 실증적인 의미 이상의 고상한 의미가 존재한다면, 금강석이 반드시 숫양의 피에 녹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금강석은 숫양의 피에만 녹는다는 진술은 진실이라고 일러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거짓 희롱이 귀한 진실을 나타내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무튼 일각수가 이땅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느님 섭리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뜻이라면 일각수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심려 말아라. 일각수는 이 서책에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참 실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실제로 존재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려무나.

「그렇다면 서책을 읽을 때도 우리는 신학적인 미덕인 믿음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요?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사부님의 지성은 일각수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는데, 도대체 일각수라는 존재가 사부님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베난티오의 시신은 돼지 피 항아리로 끌려 들어갔다. 그때 눈 위에 남았던, 베탄티오의 끌려간 흔적이 그러하듯이, 비록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일각수는 나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서책 속의 일각수는 그 흔적과 같다. 흔적이 있으면 흔적을 남긴 존재도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일각수와 그 흔적은 다른 것일 것 같습니다만.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남기는 것에 따라 흔적의 모양은 늘 같지 않고, 또 흔적이라는 것이 꼭 찍혀야 생기는 것도 아니다. 때로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마음에다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 형상은 기호의 기호, 관념의 기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육체나 관념이 없어도 이미지로써 이를 재구성한다.

「그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사부님 보시기에 넉넉한지요?

「아니다. 기호에 지나지 못하는 관념에 만족해서는 참 배움이 이뤄지지 않는다. 나름의 진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흔적의 흔적에서, 사슬의 첫 번째 고리인 내 나름의 일각수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제 베난티오의 살해자가 남긴 모호한 기호,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해 주는 흔적에서 살해자의 문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나마 단시간에는, 다른 흔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도 이제는, 이것으로 저것을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럴 터이다. 그래서 내가 나름의 일각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너무 심려 말거라. 비록 추악하고 검은 것일지 모르나, 너도 곧 너의 일각수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하)》(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