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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두려움

by 답설재 2023. 7. 9.

 

 

 

소설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에서 교황 요한 22세의 사절단장 베르나르 기가 황제의 사절단 일행,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 혐의로 수도사 레미지오를 문초하는 장면은 584쪽에서 617쪽까지이다.

 

이 34쪽을 단숨에 읽었다.

두려웠다.

이른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아무리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해도 교황이라는 사람의 '바로 아래'에서 혹은 '옆'에서 하느님을 입에 달고 살아갔을 고위 성직자가, 이렇게 잔인하고 악독할 수도 있을까? 혹 그런 직위에 있으면 하느님이 '있으나 마나' 하다는 걸 훤하게 알아서 두려움 같은 게 사라지는 걸까? 아니, 이건 소설이지? 그럼 움베르토 에코의 마음속에 이런 잔인함, 악독함이 스며 있었던 걸까?

나는 성직자라는 인간들이 하느님이 알면 아무리 마음씨 좋은 하느님이라고 해도 노발대발 세상을 뒤집어엎어버릴 것이 분명한데 그렇지도 않은 걸 보면서 하느님이 없다는 걸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저런 짓거리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 짓곤 한다.

이 책에서는, 인간이란 교화가 되지 않으면, 혹은 교화가 잘못되면, 이렇게도 잔인하고 악독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가슴을 떨었다.

그 34쪽을 다 옮겨 써놓을 수는 없다.

아래 장면에서 지금 수도사 레미지오는 문초 끝에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마침내 없는 죄를 지어내어 이야기한다. 두려움에 떠는 하소연이고 절규이다. 미친 것이다.

 

「(…)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를 동안 나는 늘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나야말로 얼마나 천박한 인간이냐…. 그러나 천박하기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참담한 경우를 모면했는데,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이냐….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어야겠다는 모진 구석도 없지 않습니다. 베르나르 각하, 오늘 당신은 나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오늘 나에게, 이교도 황제가 순교자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내 육체와는 별개로 내 영혼이 믿는 바를 고백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곧 죽을, 이 하찮은 것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용기는 요구하지 마십시오. 안됩니다, 고문은 안됩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뭐든 다 말씀드리지요. 고문을 당하느니 화형주에 그냥 달리겠습니다. 화형주에 달리면, 불에 타기도 전에 질식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돌치노가 당했던 그런 고문은 안됩니다. 안되고 말고요. 당신은 내 시체를 바라겠지요? 그렇다면 수도사들에 대한 연쇄 살인죄를 나에게 덮어 씌울 필요가 있겠군요? 곧 시체가 될 터이니 말씀드리지요.

… 나는 보시다시피 비곗살 뿐인 땅딸보, 무식쟁이 늙은이입니다. 그래서, 이 괴물 같은 나를 더욱 괴물같이 보이게 만드는, 저 젊고 기지 충만한 미남자 아델모를 죽였습니다. 내가 모르는 서책까지 읽어 너무 박식한 꼴이 보기 싫어서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를 죽였습니다. 돼지 같은 사제들 어깨너머로 신학을 주워들은 나는, 장서관 보조 사서라는 게 싫어서 베렝가리오를 죽였습니다. 네,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도 죽였습니다… 왜 죽였느냐… 이 자가 약초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역의 산〉에서 초근목피 고아 먹은 게 한스러워, 사치스럽게 약초를 모으고 다니는 세베리노를 죽였습니다. 더 말씀드리지요. 다른 수도사도 더 죽이고, 원장도 죽일 참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은 내가 재물을 관리하니까 밥을 먹여 주기는 합니다만, 교황이나 황제가 그렇듯이 원장 역시 내 원수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아, 아니군요. 어떻게 죽였는지 알고 싶겠지요. 내가 어떻게 죽였느냐… 어디 봅시다… 그렇지요, 지옥의 권세를 불러 올렸습니다. 살바토레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지옥의 권세를 불러 올리고 무수한 지옥의 군사를 부려서 죽인 것이지요.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꼭 손수 쳐야 하나요? 부릴 줄만 알면 악마가 이 일을 대신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섬뜩한 웃음을 흘리면서 방청하는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이미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웃음은 아니었다. 사부님이 지적했듯이, 레미지오는 살바토레를 끌어들임으로써 살바토레의 배신을 복수할 만큼 영리했는데도 그 웃음만은 영리한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래, 지옥의 권세는 어떻게 불렀느냐?」

베르나르가 짐짓 이 헛소리를 자백으로 받아들이는 척하고 물었다.

「알면서 그러십니까? 악마의 도포를 걸치지 않고는 악마에 들린 자를 상대로 그렇게 오래 장사를 할 수 없었을 텐데 공연히 그러십니다. 사도들 백정인 당신이 모른대서야 어디 말이나 됩니까? 이렇게 되지요, 아마? 흰 터럭은 한 올도 섞이지 않은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를 붙잡아… 이제 기억날 테지요… 네 발을 묶어, 한밤중에 네거리로 들고나가 이렇게 외칩니다.

〈지옥의 황제이신 거룩한 루치페로여, 고양이 한 마리를 붙잡아 와 이렇게 바치고 당신을 내 원수에게 붙이고자 하오니 오시어 흠향(歆饗)하소서. 내 원수를 치시면 내일 밤 자정에 다시 이 자리에 와 이 고양이를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이제 성 키푸리아누스의 비법에 따라 지옥 군단의 대장들 이름으로 아드라멜크, 알라스토르, 아차첼의 안부를 여쭙고 기도하나니….〉」

레미지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 (61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