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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인연9

스물여덟 살 친구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2022. 12. 1.
서귀포 이종옥 선생님 오랫동안 교육부에서 근무하다가 용인 성복초등학교에 가서 이종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여 선생님들은 모두 이종옥 선생님 후배여서 그분을 "왕언니"라고 불렀습니다. "왕언니"라는 호칭은 거기서 처음 들었기 때문에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아주 미워했습니다. 교육부에서 내려온 교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 미워한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장이 되어 온 것이 미운 것이 아니라 교육부 직원이었기 때문에 미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장이 온다고 해서 당장 사직을 하려다가 교육부에서 근무한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교원들이 그렇게들 미워하는가 직접 만나보기나 하고 명퇴를 하겠다"고 그 학교 교직원들에게 공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분들 .. 2021. 9. 16.
'그 처자, 부디 바라는 바대로 살고 있기를!' 그러니까 그날이 1월의 첫째나 셋째 월요일이었을 테다.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눈이 쌓인 도서관 비탈 진입로 한복판에 카오스 고양이 한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우두망찰 서 있었다. 함초롬히 어여쁜, 이제 막 청소년이 된 듯한 고양이였다. 여기 웬 고양이지?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마침 갖고 다니던 사료를 한 줌 공책 찢은 종이에 얹어 고양이 앞에 놓았다. 피하는 기색 없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이 따뜻하고 화사해 보이는 처자였다. 그 역시 나처럼 도서관이 휴관하는 걸 모르고 왔다고 했다. 이름이 혜조였던가. 길고양이 일로 얽히기도 하고 꽤 가깝게 지냈었는데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 넉넉해 보이지 않는 형편에 강인하고 의젓하게 자기 삶을 꾸려나.. 2021. 3. 21.
책 고르기, 즐겁고도 어려운 일 책 고르기, 즐겁고도 어려운 일 Ⅰ 책 고르기는 즐겁고도 어렵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즐겁다는 건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건 어려운 작업이고 더구나 남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은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책이 마음에 드는 .. 2016. 10. 27.
인연-영혼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올 가을, 끊임없이 반복될 가을입니다. 2012년 가을, 혹은 마지막 가을일 수도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그 어떤 가을도 다 괜찮고 고맙고 좋은 가을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가을도,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 소리가 들리면 쓸쓸해지고, 골목길 조용한 곳에 모여 있는 낙엽을 보면 더 쓸쓸해집니다. 이듬해 가을이 올 때까지는 설명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 가을에 37년 전 어느 교실에서, 내가 그 학교를 예상보다 일찍 떠나는 섭섭한 일로 겨우 5, 6개월? 날마다 나를 바라보던 한 여학생, 그 여학생이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나는 순간에 할 인사를 애써서 연습했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랬는지, 인사는 나누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 2012. 11. 10.
윤예영 「사이렌, 세이렌」 Ⅰ 세이렌이란 바다의 님프들로서 배가 지나갈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에는 듣는 자를 더할 나위 없이 매혹시키는 마력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랫소리를 들은 불행한 선원들은 불가항력적으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려는 충동을 느껴 물속에 빠져 죽고 마는 것이었다.1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정체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을 지도해 주신 전라도 어느 곳 출신 염길환 선생님은, 좀 작은 키에 장발이었고, 안경을 쓰셨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는 습성을 가지셨고, 언제나 다정다감하신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주 등사원지를 긁어서 검은색 글씨의 시험지와 달리 파란색으로 인쇄하는 학교신문을 발간하시고, 그 신문 3면엔가 『오디세이』를 연재하셨습니다. 나는 토요일 오후를 기다려 그 신문을 받아 읽어.. 2012. 9. 10.
그녀가 결혼한 이유 그녀가 결혼한 이유 요즘은 KBS TV의 「가요무대」를 봅니다. 어떻게 된 건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보고 싶어도 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프로그램은, 쳐다만봐다 가슴이 뻐근해지게 됐으니 지난번에 끝난 드라마 「이웃집 웬수」나 「가요무대」 같은 편안한 프로그램이 좋습니다. 어젯밤 「가요무대」는 '만추'라는 제목으로 가을 노래를 들려 주었고, 지난 8일 밤에는 설문조사로 광복 전후부터 198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인기가 높았던 곡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광복 후 1940~1950년대에는 '꿈에 본 내 고향' '나 하나의 사랑' '단장의 미아리 고개' '만리포 사랑' '봄날은 간다' '비 내리는 고모령' 같은 곡이었고, 전체 1위곡으로는 '그때 그사람'이었는데 그 노래들을 부른 가수들은 거.. 2010. 11. 16.
김원길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 퇴임을 하고 나니까 사람들과의 인연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제 맺어진 인연을 잘 지키고, 굳이 새로운 인연을 찾아나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소년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다가가다가 상처를 입고 눈물 글썽입니다. 더구나 이제 그 쓰림은 당장 의기소침으로 이어집니다. 잊혀져가던 인연들을 다시 생각하는 새벽에, 오늘도 가슴이 저렸습니다.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를 쓴 김원길 시인은, 1960년대의 누추한 제게 세상은 아름다운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는 지례예술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당시에는 안동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국어 선생님은 '국어'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 대학입학시험에 출제될 문제를 잘 가르치는 데.. 2010. 5. 5.
축전 (Ⅱ) 지난해 가을에 ‘전근 축하 전보와 편지’라는 제목으로 쓴 글은 요즘도 더러 읽히고 있는 걸로 보아 ‘축전’은 블로그 독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소재인 것 같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지난 3월에 고려대학교 최광식 교수를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신라사를 전공한 사학자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재단 설립·운영의 담당관이었던 나는 그와 자주 만나야 했습니다. 그는 매우 소탈하고 선이 굵은 학자입니다. 동북공정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여러 곳에서 강의나 회의 요청이 늘어나자 더욱 바빠져서 잠잘 시간이 부족하다며 승용차를 두고 주로 택시를 타고 다니며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인다고 했습니.. 2008.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