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원길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

by 답설재 2010. 5. 5.

퇴임을 하고 나니까 사람들과의 인연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제 맺어진 인연을 잘 지키고, 굳이 새로운 인연을 찾아나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소년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다가가다가 상처를 입고 눈물 글썽입니다. 더구나 이제 그 쓰림은 당장 의기소침으로 이어집니다.

잊혀져가던 인연들을 다시 생각하는 새벽에, 오늘도 가슴이 저렸습니다.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를 쓴 김원길 시인은, 1960년대의 누추한 제게 세상은 아름다운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는 지례예술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당시에는 안동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국어 선생님은 '국어'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 대학입학시험에 출제될 문제를 잘 가르치는 데는 소질이 없었을 것입니다. 곧 국어 선생을 집어치운 걸 보면 그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단 한 푼'도 값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찾아가지 않은 세월이, 그에게 오히려 득(得)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그럴 것이 분명합니다. 손해 날 일 없고, 마음 편하고, 그래서 더 좋다면 그만입니다.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

 

 

굳이

어느 새벽꿈 속에서나마

나 만난 듯하다는

그대,

 

내 열번 전생의

어느 가을볕 잔잔한 한나절을

각간(角干) 유신(庾信)의 집 마당귀에

엎드려 여물 씹는 소였을 적에

 

등허리에

살짝

앉았다 떠난

까치였기나 하오

 

참 그날

쪽같이 푸르던

하늘빛이라니.

 

                                           - 金源吉 시집 『들꽃다발』(1994, 길안사)에서

 

 

 

  인연(因緣)에 대해서라면,

  아니 뭐랄까…… 추억과 그 추억 속의 한 부분이 된 사람에 관해서라면,

  이 시인의 어느 시 한 편을 인용해서 이야기하면 거의 정확한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단정(斷定)하며 지낸 세월이 40년이 넘었고, 실제로 더 나은 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찔레라도

   

누구는 가버린 사랑을

이슬에 씻기운 한 송이

장미로 보듬는데

 

그대 내 가슴에

사철

꽃도 잎도 안 피는

메마른 가시넝쿨로 남아

 

바람이 일 적마다

서걱

서걱

살을 저민다.

 

나는 애써

찔레라도 피우고파

찔레라도

피워 가지고파

눈물로 물준다만

 

추억이여,

한송이 가시없는 풀꽃으로나

피어 남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