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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인환 「목마와 숙녀」Ⅱ

by 답설재 2010. 4. 3.

「자작나무숲의 작은 세계에서」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고1 여학생입니다. 2006년 가을엔가 '바다를 비추는 등대'라는 제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인디언식이네?" 했더니 자신의 이름은 '생각하는 자작나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그 아이의 블로그를 찾아가 봤더니 469편의 글이 실려 있고, 이 아이의 호흡을 따라잡기가 이처럼 어렵구나 싶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몇 자 적어 놓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초등학교, 더구나 당시의 교장 따위를 상대하고 싶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일이지요.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고, 시험성적도 월등하고, 조용하고 …… 비범합니다. 그 블로그 메인 화면을 캡쳐해 왔습니다. 상대해 주지도 않는 '상대'지만...

 

 

 

블로그 「자작나무숲의 작은 세계에서」의 메인 화면(일부)

 

 

 

'바다를 비추는 등대'…….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일을 하니까요."

그러나 그 이름의 시효도 끝나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굳이 설명하면 새로 등대가 세워져서 내 등대는 불이 꺼진 채 우두커니 서 있다고 하면 될까요? 쓸쓸하고 썰렁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생각났습니다.

뭐 내 처지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생각났습니다.

더 설명하기가 싫습니다.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집『목마와 숙녀』(문학과현실사, 2009),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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