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文學』 2010년 2월호 「누군가의 시 한 편」(제50회)에 소개된 김남호 시인의 詩(김남호 시인의 시집『링 위의 돼지』(2009, 천년의시작)에서 김사인 시인이 뽑은 시.
참 좋은 저녁이야
유서를 쓰기 딱 좋은 저녁이야
밤새워 쓴 유서를 조잘조잘 읽다가
꼬깃꼬깃 구겨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픽 픽 던져버리고
또 하루를 그을리는 굴뚝새처럼
제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처럼
길고도 지루한 유서를
담장 위로 높이 걸어놓고 갸웃거리는 기린처럼
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자벌레처럼
백일장에서 아이들이 쓴 유서를 심사하고
참 잘 썼어요, 당장 죽어도 좋겠어요
상을 주고 돌아오는 저녁이야
우리가 어렸을 적, 동네 큰제삿날 절편을 얻어먹던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도리'는 지키던 -그렇지 못하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청장년들이
누가 죽은 저녁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떠들썩' 돼지를 잡아 술부터 한 잔 하던
……
우리가 어렸을 적 그 시절에는
산소 앞에 상돌 분향로를 놓거나 망두석 석등을 세우지 않아도
그게 누구네 산소인지 잊어버리는 일 없고 남들도 다 알아주기 마련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또나 개나' 상돌 망두석 석등을 세우고
부끄러워서 세우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더 크고 멋지게 세우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어서
사람이 죽어도 모여들 마음도 없고
아이들도 모여들지 않습니다.
재미도 없고 이상하기만 한데 모이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죠.
옛날에는 아무리 가난하고 못나도 종손(宗孫)은 종손이고 형은 형이어서 아우가 형이 될 수는 없었는데
요즘은 돈 많은 놈이 형 노릇 빼앗는 바람에 진짜 형은 '형편없는 놈'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무슨 그룹 회사 회장·사장이면 제사 때 가장 먼저 잔을 올리는 '종손' 노릇까지 대신하여
진짜 종손은 심부름이나 하게 되었으니
'웃기는 세상'이 된 거지요.
「참 좋은 저녁이야」를 노래한 김남호 시인은,
'개판'이 된 세상을 한탄한 시를 쓴 것 아닌가 싶습니다.
굴뚝새처럼
왜가리처럼
기린처럼
자벌레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들을 보면서
'질서를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길을 가야하지 않겠는가!'
'생로병사의 이치가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걸 노래한 시가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유서를 쓰는 일은 진지해야 하고
얼굴 찡그리지도 말고
내가 떠나도 즐겁게 활기차게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저것들'을 위한 일들을 열거하고
필요한 부분을 설명하는 일이어야 할 텐데
요즘 밝혀지는 유서들은 감동적인 경우는 찾기가 어렵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아서
그런 유서가 과연 <유서 쓰기 참 좋은 저녁>에 쓴 것인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백일장 심사해주고 돌아오며 설마
새파란 아이들을 향해 "얘들아, 너희는 유서를 잘 썼으니 당장 죽어도 좋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만큼 순수하게 사람답게 멋지게 썼다는 걸 강조한 것 아니겠습니까.
"구구팔팔!"
99세, 100세까지 살았어도 건강에 무슨 원한이 맺힌 사람처럼 그야말로 '건강하게' 사는 데만 신경을 써서
아직 유서를 쓸지 어떻게 할지도 결정하지 못해 절대로 지금 죽어서는 안 되는 그런 인간이 너무나 많다는 걸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그 애들이 훨씬 낫다는 걸
시인으로서 시인답게 강조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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