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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 명 리 「선물」

by 답설재 2010. 3. 3.

선 물1

 

                 김 명 리

 

우리가 헤어지던 그해 겨울 당신은 내게 향로를 주었다

손아귀로 꼭 한 줌, 저녁 숲에 차오르는 이내를 닮았다 했으나

뚜껑 여닫을 때마다 바스락거린다

봄 강 물마루의 얼음장 풀리는 소리가 난다

보름사리로 밀리며 쓸리는 달빛, 물빛

유채꽃 불씨들이 한줄금 연무로 날아오르고

물그림자 흔들흔들

밤이면 스모그빛으로 소용돌이치는 달의 행로를 비추지만

모로 눕히면 허공이 쏟아지는 박산향로博山香爐다

뉘 무덤에 물리는 젖 내음인지

어느 곳도 향하고 있지 않은 무하향無何鄕

청명한 밤에는 먼 절 사미니의 목탁 내리는 소리

천지간 흩날리는 연분홍 털오라기들로만

당신이 두세두세 내 흉금에 꿰매놓은 박산향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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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등.

 

 

그 향로가 이 생애를 결정지었습니다. 철저하게.

그러므로 그 향로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헤어지며,

그렇게

이 가슴에 묻어놓고 꿰매어버렸습니다.

 

선물…….

그렇게 누구에겐가 '선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제가 그런 선물이었다면,

그런 선물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한 건

참 단순하고 얄팍한 마음이어서

사실은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모두 선물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다만 그 선물이란 게

가령, 아늑한 젖무덤 같은 것으로 남은 것일 수도 있고,

지긋지긋하여 몸서리치는 것으로 남은 것일 수도 있고,

다시 찾아가 먼 빛으로라도 살펴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

따져보면 다 그런 건 아닐까요?

 

 

『현대문학』2009년 11월호, 172~17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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