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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책 고르기, 즐겁고도 어려운 일

by 답설재 2016. 10. 27.






책 고르기, 즐겁고도 어려운 일











  책 고르기는 즐겁고도 어렵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즐겁다는 건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건 어려운 작업이고 더구나 남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은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를 경험하기 어려웠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따스한 마음으로 분명한 삶의 길을 가고 있는 분으로부터 "필사할 만한 책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혹 "이 책 좀 읽어보시라"는 우스운 짓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반은 책을 고르는 사치의 즐거움으로 반은 실망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욕심과 그 중압감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우선 문학이나 예술에 관한 책을 고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원하는 바가 아닐 것 같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서릿발, 이슬방울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번역의 벽이 느껴지지 않을 책, 그러면서도 삶의 무게를 염두에 두어 친밀감을 주는 책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그런 책을 서가나 읽은 책의 목록을 들여다보지 않고 고르기로 했습니다.





  《고맙습니다》(올리버 색스)는 누구보다 어려운 삶을 살아간 사람이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조용해진 가슴으로 쓴 책이었습니다. 그는 성 소수자였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결코 성소수자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선택은 아닙니다. 이젠 곧 돌아가야 할 길을 자주 생각하면서도 아직까지 꺼내지 못한 저 자신의 '숙제'도 저에게는 올리버 색스의 성 문제만큼 어려운 과제이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올리버 색스처럼 그것을 해결하고 갈 수 있다면 이 삶은 얼마나 다행한 것인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특별한 경우의 사람이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삶의 무게라는 건 누구에게나 그만큼 무겁고 벅찬 것이 아닌가 싶고, 그러므로 이 책(50쪽)을 읽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값진 시간일 것 같았습니다.


  《시간의 여울》(이우환)도 그런 눈으로 읽기에 충분한 에세이였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고귀한 사유가 서려 있는 詩, 가슴 떨리게 하는 그림, 마음을 흔드는 음악 같고, 그의 작품을 눈앞에 보는 것 같고, 진정한 예술가가 어떤 혼으로 작품을 제작하는가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저를 붙잡아 앉혀놓고 혼신을 다하여 가르치려는 것 같아서 그의 정신세계에 가까이 가는 것이 차라리 두려웠습니다.

  그에 대하여 더러 "친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고맙고 다행스럽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책처럼 이 책도 번역된 것이긴 하지만 번역본을 읽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글이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일흔이 넘어 아직도 기초조차 마련하지 못하여 잡문 하나 들고도 쩔쩔매는 자신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게 한 책들이었습니다.


  《침묵의 세계》(막스 피카르트)는 마음을 어떠한 상태에 두어야 하는지, 세상은 어떤 곳인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번역된 문장이 때로는 얼른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견딜 만은 하고, 바보처럼, 혹은 아이처럼, 읽은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어지러운 마음이 침묵 쪽으로 다가간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많이 읽어도 조금씩 읽어도 그 글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책을 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언제나 떠들썩한 학교, 이런 일 저런 일1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은 수많은 사람들과 다 헤어져 이렇게 들어와 앉은 이 아파트, 저녁만 되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세상의 이 시간이 외롭고도 정겹게 된 것은 이 책을 읽은 후부터였을 것입니다.


  《만남, 죽음과의 만남》(정진홍)은 다시 읽고 싶은 책이 한 권이어야 한다면 저에게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이 책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종교에 편승한 관점 없이 조용조용 이야기해나가는 품이 고마웠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만큼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우스운 말씀이지만, 저 《침묵의 세계》와 함께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책이었고 심지어 얼른 절판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 책들을 읽고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글들을 찾아보고 이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뵙고 차 한 잔 마시며 고마운 말씀들을 많이 듣고 그 끝에 한 가지 말씀을 드리게 된다면 이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쑥스럽지만 이것은 무얼 보고 말씀드리지 않고 바로 저의 것에서 나누어 드리는 성의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주제넘은 말씀입니다. 어차피 읽는 이의 눈과 가슴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에 대한 그 말씀은 실로 놀랍고 소중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소년과 같은 씩씩함으로 이처럼 무모한 짓을 했지만, 저 자신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 절실한 주제가 되었으니 그것도 고마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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