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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외로움9

외롭고 쓸쓸하면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안토니나 할머니가 예전처럼 칸토 가에서 살고 계실 듯했다. 우리에게 배달된 적십자 엽서에 따르면, 우리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를 거부했던 할머니는 이른바 전쟁의 시작 직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가 여전히 금붕어를 매일 부엌의 수도꼭지 아래에 놓고 씻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창틀로 옮겨놓고 신선한 바람도 좀 쐬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돌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옮긴 문장입니다(창비.. 2022. 4. 11.
『상실 수업』⑵ 편지쓰기(발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상실 수업』 김소향 옮김, 인빅투스, 2014 때로는 과거를 우리 입맛에 맞게 만들어 그것을 정화하려고 한다. 우리의 실수가 밖으로 퍼져나가기를 원치 않으며 특히 누군가를 잃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작업을 거치다 보면 그 사람의 전부 그리고 장단점, 밝고 어두운 면 모두 포함한 그대로의 모습을 애도할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150) 슬픔은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고통과 슬픔은 오직 표현할 때만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사랑한 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실천하기 편하며, 단어를 밖으로 꺼내어 언제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의사소통을 상실해버린 고인이 된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써야 하며 심지어 왜 편지를 써야 하는가? 기억나는 만큼 멀리 과거.. 2022. 2. 10.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은 후에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할 수 없어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이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읽는데(73 L5) 돌연 내 또래의 어느 가수가 떠올랐다. "주제넘다"고 할지 모른다.("너는 뭐 외롭지 않은 인간인 줄 아니?") 그는 TV에 출연해 이야기하는 내내 외롭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외로움' '슬픔'으로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며 인터넷에서도 살펴보았다. 거의 방송에서 본 내용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의 생활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시절, 그는 애절한 노래의 진수를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기타만 가지고 누군가가 제공해 준 조그마한 공간에서 지낸다. 자유로운.. 2019. 6. 15.
외롭게 살려고 온 사람 1월 말이었지? 한 종편 방송에 70년대 가수가 보였다. 애절한 저음으로 작별(作別)에 관한 노래들을 부르던 가수. 쓸쓸히, 그렇지만 괜찮다는 듯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고 있었다. 공학자(工學者)였던 아버지는 월북했고, 어머니는 누나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은 동생과 함께 외가에 남았는데 그 동생마저 일찍 죽었다고 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무(全無)하다고 했다. 작별에 관한 노래로 한 시절을 풍미한 이가 저런 사연을 가지고 있었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내와도 이혼하고 지인이 제공해준 소규모의 목조 '공간'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공간', 그 거처를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서 나는 한동안 그의 인터뷰를 듣지도 않고 '저 거처는 그저 공간(空間)이라고 불러야.. 2019. 3. 3.
섬진강, 어디쯤의 LA MAISON DOUCE 섬진강, 어디쯤의 LA MAISON DOUCE 이건 뭐 부끄러워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섬진강 사랑의 집> '자훈'님의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저 고운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여기 이렇게 옮겨두게 되었습니다. 2013. 12. 11.
「빈 배처럼 텅 비어」 지난 8월 17일에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13년이나 지낸 곳입니다. 범어네거리 근처의 한 호텔에서 개최된 연수회에서, 제 강의는, 오후 1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의 두 시간이었고, KTX는 11시 53분에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5시 18분에 서울로 출발하는 표를 끊었으므로 도착해서나 출발할 때나 각각 1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은, 요즘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시간이 좀 생겼다"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을 사람을, 그 더운 날 한낮에 '돌연' 만나자고 하면 웬만하면 만나는 주겠지만 그 속사정이 어떨지, 아무래도 그리 석연치 않은 만남일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어도 괜찮기는 합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수십 개의 전화번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 2012. 8. 26.
이 적막(寂寞) '적막'이 고요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정말이지 참 적막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적막한 곳은 처음입니다. 비가 올 기미가 있을 때면 멀리 추풍령을 오르내리는 기차 소리가 가물가물하게 들려오던,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고향집보다도 더 적막한 곳입니다. 경춘선 열차를 내려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조금만 기다리면 이내 버스가 오고, 10여 분이면 도착해서 한 5분만에 걸어올라올 수 있는 아파트인데도 이렇게나 적막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텅 빈 아파트 단지에 아내와 나만 사는 것 같습니다. 내려다보이는 정원에 보안등이 켜져 있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서럽다 싶을 만큼 적막합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곳으로 이사온 내내 그렇습니다. ♣ 잘 .. 2012. 4. 22.
내 그림 Ⅰ(빈 나룻배) BONA가 준 그림입니다. 교장실에서는 뒷쪽 구석진 벽에 걸려 있었어도 뭐라고 할까, 아담하고 그래서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언제 한번 물어봤더니 두물머리라고 해서 두물머리면 한적하고 아름다워 연인들, 관광객이 많이 찾으니까 빈 나룻배라 하더라도 결코 외롭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싶기까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출입구 옆 저 곳에 옮겨 놓는 순간 좀 외롭게 느껴져서 처음에는 내 마음이 그렇거나 그림도 사람처럼 낯선 곳을 알아보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고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외로워졌습니다. 저걸 어떻게 하나, 그게 숙제가 되었습니다. BONA는 자신이 처음으로 그린 것이라며 좀 부끄러워했지만, 나에겐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커녕 처음 그린 거라니까 더 소중할 수밖에요. 문제는 저렇게.. 2010. 12. 23.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정말이지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오고 갈 수는 없을까. 그렇게 가서는 “화장실 가서는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잊혀지는 것. “죽음을 알리지 말라”느니, “빗돌을 세우지 말라”.. 2009.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