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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적막(寂寞)

by 답설재 2012. 4. 22.

 

 

'적막'이 고요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정말이지 참 적막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적막한 곳은 처음입니다. 비가 올 기미가 있을 때면 멀리 추풍령을 오르내리는 기차 소리가 가물가물하게 들려오던,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고향집보다도 더 적막한 곳입니다.

 

경춘선 열차를 내려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조금만 기다리면 이내 버스가 오고, 10여 분이면 도착해서 한 5분만에 걸어올라올 수 있는 아파트인데도 이렇게나 적막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텅 빈 아파트 단지에 아내와 나만 사는 것 같습니다. 내려다보이는 정원에 보안등이 켜져 있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서럽다 싶을 만큼 적막합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곳으로 이사온 내내 그렇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세상이 이렇게 적막한 것이 아니라 내 처지가 적막해진 것입니다. 아파트 마당 건너편에는 휘트니스 센터도 있고, 정문 바로 앞에는 초등학교도 있습니다. 낮에는 그 학교에 아이들이 모여 조잘대고 선생님들은 내가 학교 교장이었을 때 만난 그 여러 선생님들처럼 매일 같이 "얘들아! 좀 조용히 해봐! 내 말 좀 들어봐!" 호소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퇴임하자마자 아이들이 다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낼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 아래 마을에 내려가면 대형 마트들도 있고 동사무소나 스포츠센터도 있고 온갖 가게들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젊은이들은 서울의 젊은이들처럼 그 거리가 강남대로인양 그런 옷차림 그런 모습으로 오가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세상이 내가 퇴임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변한 것도 아니고 그럴 리도 없고 어쩌면 더 번잡해지고 더 시끄러워지고 있을 텐데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적막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살아오면서 자주 이런 적막을 꿈꾸어 왔습니다.

'아, 정말! 언제 좀 조용하게 살아보나…………'

그러므로 지금 너무나 적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저 번잡한 '세상'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해도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꿈꾸어온 이 적막 속에서 이렇게 지내는 것이 이 적막을 견디는 것이 참 힘들지만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나이들어 퇴직을 하면 가족 간의 대화에 힘쓰고 가사에 잘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지내는 것이 좋으므로 친구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모임을 많이 만들어 잘 참석해야 한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그렇게 돌변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적막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것 아닙니까? 이 적막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는 혹은 이 적막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가식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뭘 하겠습니까? 그게 해결책이 됩니까? 다 소용 없는 일 아닙니까?

"나는 쓸쓸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

글쎄요, 그런 상태 쓸쓸하고 조용하고 외로운 상태가 분명한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건 가령 무슨 약을 먹어서 아픈 줄도 모르게 되는, 무엇에 중독된 것과 마찬가지인 건 아닐까요?

 

사람들과 어우러져 지낸 몇 시간 뒤에는 돌아와 앉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이렇게 밀려오는 이 고요함과 쓸쓸함 외로움은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텔레비전을 쳐다보면 됩니까? 그러면 적막해지지 않습니까?

나로서는 벚꽃이 진다고 봄나들이 가자고 연락 온 곳이 몇 군데 있었던 날 저녁에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그렇지 않은 척 살고 싶진 않습니다. 꼬박꼬박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 아내가 좋아할 리도 없고 오히려 귀찮다고 싫어할 일이긴 하지만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처럼 걸핏하면 아내 혼자 남겨 놓고 사람들 만나보고 저녁 늦게 돌아오기도 싫습니다. 만나자는 사람들 굳이 피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중독되어' 살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적막으로 인해 드디어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적막과 맞서 싸워 결판을 내거나 "우리 한번 잘 지내보자"고 화해를 하거나 해야지 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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