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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산책9

메기가 사는 곳 저기서 제법 큰 메기 한 마리를 봤다. 분명히 메기였다. 유유히(혹은 평화롭게) 헤엄쳐 건너편 돌 밑으로 들어갔다. 누가 민물고기매운탕감이라며 뛰어들어가서 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산책이나 운동하는 사람들은 백로, 청둥오리 같은 것들이 먹이를 찾으며 노는 장면을 아름답게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기만 하니까 믿어도 될 것이다.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들이 고기를 잡는다고 다리를 걷고 들어가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은 여러 번 봤지만 실제로 잡은 아이는 본 적이 없다. 이런 세상에, 메기가 여기까지 다 올라오다니... 2023. 6. 8.
「샤갈의 마을」展(2010 겨울) 2010년 겨울, 「샤갈의 마을」展이 열리고 있었다(2010.12.3~2011.3.27. 서울시립미술관). 그 겨울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약골이긴 하지만 병원에 간 적 없었는데 한꺼번에 무너져 아팠고, 41년 공직에서 퇴임을 했고, 그런데도 큰일들을 치러야 했다. 그런 중에도「샤갈의 마을」을 볼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샤갈이 그가 사랑한 러시아의 마을을 어떻게 그렸는지,「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에 등장하는 그 아낙,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지피는 그 아낙', 혹은 「忍冬잎」(김춘수)에 나오는 저 '이루지 못한 꿈을 가진 인간'의 눈으로 구경할 수 있으면 싶은 마음으로 그림들을 보려고 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좀 소란스럽고 무질서했다. 우리는 이미 돈이 많은 나라니까 좀 소란스럽고 .. 2023. 5. 17.
민구 「걷기 예찬」 걷기 예찬 민구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제중 조절, 심장 기능 강화, 사색, 스트레스 해소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걷기란 갖다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는 만 오천 보 정도 이동해서 한강공원에 나를 유기했다 누군가 목격하기 전에 팔다리를 잘라서 땅에 묻고 나머지는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졌다 머리는 퐁당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시 붙어 있었고 나는 잔소리에 시달려서 한숨도 못 잤다 걷기란 나를 한 발짝씩 떠밀고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걸을 때도 있었다 나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더 가까워지리란 믿음이 있거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걷기를 예찬했다 그런 날에는 밤 산책을 나가서 더 멀리 더 오래 혼자 걸었다.. 2022. 11. 27.
누리장나무에게 누리장나무를 처음 발견한 건 내가 참 쓸쓸한 때였다. '뭐지?' 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냄새가 실망스러워서 전체적 인상은 '꺼림칙한 나무'였다. '내가 여기서 나쁜 냄새를 맡아 더 쇠약해지면 또 드러눕는 수밖에 없겠지?' 악취가 내 심장을 짓눌러 쪼그라들게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나무가 가까워지면 숨을 충분히 들이마신 다음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촬영할 때처럼 숨을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가서 더 이상 숨을 참다가는 무슨 수가 날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에 이르러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쉬면서 그 고통으로 헐떡이곤 했다. 이렇게 해서 이 길이 어떻게 좋은 산책로가 되겠는가. 그 나무는 또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인터넷 검색창을 떠올리고는 그날 저녁 내내 찾아다니다.. 2021. 8. 12.
저 강아지의 영혼, 나의 영혼 저 강아지가 이쪽으로 건너오고 싶어 합니다. 주인은 저쪽 길을 그냥 걸어내려가고 싶었습니다. 주인이 가자고, 그냥 가자고 줄을 당기면 강아지는 이쪽을 바라보다가 주인을 바라보다가 번갈아 그렇게 하면서 버텼습니다. 강아지는 말없이 주장했고 주인은 "가자" "가자"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다투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습니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 싶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더니 주인이 강아지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쪽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자초지종 다 살펴보고 이쯤 와서 생각하니까 '이런!' 어떤 여자였는지 살펴보질 못했습니다. 아니, 이건 말이 되질 않고 아마도 예쁜 여자 같았습니다.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 강아지보다는 자기주장.. 2021. 6. 5.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걷기 예찬》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10(초판 16쇄)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보던 고급 에세이의 이 분위기는 마지막까지 거의 변함없다. 재미있는 일화도 몇 편 들어 있고 자주 장자크 루소, 피에르 상소, 패트릭 리 퍼모, 바쇼, 스티븐슨의 문장이 등장한다. 걷기가 죽음을 유보시켜 준다는 걸 강조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 2021. 3. 25.
등산 혹은 산책, 삶의 지혜 뒷산 중턱까지 2킬로미터는 잘 걷는 사람은 사십 분쯤? 내 아내도 한 시간 삼십 분쯤이면 다녀옵니다. 나는 그렇게 걷는 걸 싫어합니다. 땀을 흘리며 올라가는 것도 그렇지만 아주 드러내 놓고 팔을 휘두르며 푸푸거리고 올라가는 사람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삼십 분에 주파(?)하겠지요? 그렇게 애써서 올라가면 그다음엔 뭘 합니까? 나는 그 길을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을 하며 혼자 오르내립니다. 올라갈 때는 저절로 과거와 미래의 일들이 떠오르게 되고 내려올 때는 주로 현재의 일들이 생각나고 더러 가까운 미래의 일도 생각합니다. 어슬렁거리는 꼴이니 힘들지도 않고 외로워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내려오며 이 행복한 시간이 언제까지 주어질 수 있으려나 했고, 카페에 들러 건강빵을 하나 사.. 2020. 7. 26.
함께 날기와 날려주기 출처 《샤갈 Chagall》(2010.12.3~2011.3.27. 서울시립미술관). 누구나 한때 함께 나는 것일까. 누구나 한때 날려주는 것일까. 어떤 이는 샤갈처럼 자주 함께 날고 자주 날려주며 살아가는 것일까. 왜 그런 것일까. 2019. 5. 7.
이 얼굴 Ⅳ (이창호) '바둑의 황제'로 불리는 이창호 9단의 얼굴입니다.* '황제'인데도 왜 쓸쓸해 보일까요? 쓸쓸하게 보일 때 찍은 사진입니까? 아니면 보는 사람의 마음 때문입니까? 사진을 그렇게 본 후에 읽어서인지 인터뷰 내용도 쓸쓸하게 읽혔습니다. 기자의 문체가 쓸쓸한 걸까요, 아니면 황제는 다 쓸쓸한 걸까요? 인터뷰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덧 만 35세의 중년이 됐어도 그에겐 여전히 '꼬마 신동'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종종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그는 '여전히 이창호'다. 농심배에서 막판 3연승으로 기적같은 한국 팀 우승을 이끌더니 최근엔 최고 전통의 국수(國手)에 복귀했다. 간혹 지친 듯, 배터리가 소진된 듯하던 모습을 벗어나 다시 의연한 모습으로 되돌아와선 국내 최대주주(3관왕) 자리.. 2010.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