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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존 쿳시 《슬로우 맨》

by 답설재 2017. 7. 13.

존 쿳시 J. M. Coetzee 《슬로우 맨 SLOW MAN》

 왕은철 옮김, 들녘 2009 

 

 

 

 

 

 

 

1

 

프랑스 태생 폴 레이먼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귀화한 늙은이입니다. 이혼을 해서 혼자 지냅니다. 그 서글픈 늙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에 들이받혀 한쪽 다리를 무릎 위까지 절단당한 비참한 상황에서 그를 간호하러 오는 마리야나 조키치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사라고 되어 있을 뿐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노인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가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닐까요? 행운이 어디 그리 흔하겠습니까?

 

"그 다음이라뇨? 일요일 다음에 말인가요? 일요일 다음에 더 이상 뭔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일요일은 조키치 부인을 포함해서 조키치 가족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 될 거예요. 아쉽게도, 조키치 부인에 대한 것도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예요. 나긋나긋한 종아리. 화려한 엉덩이 선. 매력적인 우스꽝스러운 말씨. 회한이 곁들여진 좋은 기억들. 기억들이 그러하듯이 이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질 거예요. 시간은 위대한 약이잖아요. 하지만 웰링턴학교로부터 분기마다 청구서가 날아올 거예요. 당신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니 틀림없이 돈을 낼 거고요.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리야나, 멜, 드라고, 류바 올림.' 이런 내용의 크리스마스카드를 받게 되겠죠."(339~340)

 

 

2

 

사랑은 어떻게 찾아오는 것입니까? 혹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운명적으로 맺어지는 것이어서 때로는 지구 끝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헤매고 헤매다가 저 먼 길의 끝에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게 되고, 죽음 같은 고비를 넘어가서 구해오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폴 레이먼트는 조키치 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애욕에 눈먼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대방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그에게 오묘하게도 당신은 나를 찾아오고 나는 당신을 찾았다며 저 불운하고 불편하고 그래서 비참해진 그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여사가 위와 같이 빈정거렸습니다.

폴 레이먼트가 반문합니다.

 

"그렇군요. 코스텔로 여사, 오늘은 예언을 할 기분인 모양인데, 내 미래에 대해서 더 알려줄 게 있나요?"

"그러니까 마리야나를 대치할 누군가가 있는지, 아니면 마리야나가 끝인지 알고 싶다는 건가요? 그건 하기 나름이죠. 당신이 에들레이드에 머물면, 간호사들만 많이 보게 되겠죠. 어떤 사람은 예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리 예쁘지 않겠지만, 누구도 마리야나 조키치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할 거예요. 반면에 당신이 멜버른으로 온다면, 내가 있을 거예요. 말 잘 듣는 늙은 말인 내가 말이죠. 내 종아리가 당신의 엄격한 기준에는 못 미치겠지만 말이죠."(340)

 

 

3

 

"충격이 전류처럼 날카롭고 놀랍고 고통스럽게 오른편에 가해지면서 그의 몸이 자전거에서 들린다. (……)"

 

소설의 첫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읽을 만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쉽게 읽히겠구나.'

그러다가 슬며시 '이건 간단하지가 않네?' 싶었는데 문장 하나하나에 폴 레이먼트의 사고가 스며 있어 그 사고에 동화되지 않고는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언제 다 읽지?' 싶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책장이 넘어가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게 아쉬웠습니다.

 

폴 레이먼트가 늙은이라는 것, 게다가 불구라는 것, 너무나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느끼면서도 온갖 구실을 붙여 '애욕에 눈먼 사랑', '간단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변명(설명)해 나가는 장면들이 너무나 실제 같아서, 문장들은 철저히 간소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그 늙은이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읽을 만한 소설입니다.

 

 

 

 

 

 

'노루' 님으로부터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이 2014년 8월 어느 날이었으니 감사의 인사가 무색해진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