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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펄 벅 《북경에서 온 편지 Letter From Peking》

by 답설재 2017. 7. 29.

펄 벅, 오영수 옮김

《북경에서 온 편지 Letter From Peking

지성문화사, 2010(재판)

 

 

 

 

1

 

사랑하는 나의 아내에게.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부터 하고 싶소. 지금 내가 어떻게 지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오. 비록 내 편지를 다시는 못 받게 되더라도 나는 마음속으로 매일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오. 다음 내용을 읽으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어쩔 수 없이 중국 여인을 우리 집에 맞아들여야 했소. 집안일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오. 지금 나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를 보여 주어야 할 입장이오. 나는 미국인의 피를 저주해야 하며 내 혈통에 반역하겠다고 선언해야만 하오.

(……) (146~147)

 

대학 총장 제럴드는 중국이 공산화될 즈음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드, 아들 레니를 미국으로 보내고 북경에 남았습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피살당한 어머니를 따라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2

 

제럴드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엘리자베드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 엘리자베드의 독백입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늘은 1950년 9월 25일, 나는 지금 버몬트 산악 지방의 한 마을에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고, 그 후 바다를 건너가 사랑하는 그이의 나라를 마치 내 나라처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탓으로 다시 이 골짜기로 돌아와야만 했던 것입니다.(6)

 

경어체이기 때문인지 『서정가』(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연상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아주 긴 사랑의 편지를 읽는구나 싶었습니다. 제럴드의 저 편지는 편지 속의 편지인 셈입니다.

 

이런 훌륭한 편지가 세상에 나와 있는데도 더러 편지를 쓰며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개구리가 울어대는 여름밤……" 혹은 "들국화, 코스모스가 애잔한 모습으로 손짓하는 가을날……" 어떻고 했으니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3

 

엘리자베드는 그 외로움 속에서 시아버지를 찾아 치매에 걸린 그를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고, 아들 레니가 혼혈로 인한 갈등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 결혼하게 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는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젊은 농부 샘, 의사 브루스 스폴든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4

 

이 '독백'(혹은 '편지')에는 동양적 정서가 배어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영혼이나 유령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는 걸 보여줍니다.

 

책을 막 펼쳤을 때 나는 내가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의혹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눈을 들었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제럴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수염과 머리를 아주 짧게 깎고 중국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사복이 아니라 학생들이 입는 제복처럼 우중충한 색깔의 천으로 만든 것이었고 목까지 단추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제럴드의 모습은 잘 볼 수 없었으나 그이의 얼굴만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이는 나를 보고 웃었으며 우울해 보이는 까만 눈이 한 순간 빛났습니다. 그때 제럴드가 나를 안아 주려는 듯 두 팔을 벌린 것 같았으나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그이에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확실히 그랬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제럴드! 제럴드! 제럴드, 오오!"

나는 그이의 얼굴에 나타난 대단히 고통스런 표정 때문에 잠시 멈칫했으나 곧 달려가서 품안에 안기려 했는데 그이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나는 그이가 서 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210~211)

 

엘리자베드가 그 환영을 보고 있었던 그 순간 제럴드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 사실은 제럴드와 함께 생활하게 된 여인 매란으로부터 온 편지로써 알게 됩니다. 제럴드는 피살되었습니다. 매란은 제럴드가 끝까지 엘리자베드를 사랑했다는 것, 자신이 제럴드를 닮은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려줍니다.

엘리자베드는 그 편지를 읽으며 자연과 인생의 흐름은 기묘하고도 심오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5

 

이야기는 시아버지에 대한 엘리자베드의 회상으로 끝납니다.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바바, 당신은 당신이 하신 일을 알고 계시겠죠? 당신은 당신이 사랑한 순수한 미국 여성이 당신을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은 데서 받은 상처를 안고 북경으로 가셨고, 별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쨌든 사랑할 수 없는 여인을 아내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의 아들을 낳았으며 어느 날 저는 당신의 그 아드님을 만나게 됐고 또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리하여 북경에 가게 되었고 그 도시를 내 고향처럼 사랑하게 되었으나 끝내는 나 홀로 내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헤어지도록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의 두 손자가 지구 반대편에 서로 떨어져 존재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손자들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합쳐져야 할 것이며, 그들도 언젠가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바바? 산중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홀로 누워 계신 바바! 이런 사실에 대해 뭐라고 속 시원히 한 말씀 들려주시지 않으렵니까?(229)

 

 

6

 

제럴드와의 이별, 그 상황만으로는 매우 단조로운 이야기일 것 같았는데 긴장감이 간단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또 어떤 것일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긴 편지의 어느 한 곳, 마음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이 책은 재판(再版)인데도 오탈자가 많은 것이 아쉬웠으나 번역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