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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물리학자의 세계

by 답설재 2016. 9. 11.

                                                                                                   출처 : NASA

 

 

Λ

 

K 교수는 물리학자입니다.

그의 연구실이 있는 기관의 자료를 보면 "Professor Emeritus Neutrino Physics and Cosmology"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 사진의 저런 공간을 연구한다는 것이겠지요?

 

과학 관련 국제행사나 무슨 세미나가 열리는 날에는 만날 수가 없지만, 버스나 전철역에서 곧잘 만나게 되고 세상 얘기를 나누며 오고 갑니다.

 

잘난 척하지 않고, 전문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무엇이든 다 얘기해줍니다. 일전에는 상대성 원리를 일반 상대성 원리와 특수 상대성 원리로 나누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E=mc²》이라는 책을 읽어도 도무지 뭔 말인지 몰랐는데 그걸 15분 만에 공식 같은 건 동원하지 않고 설명했습니다. 들은 대로 이야기해보라면 못하겠지만, 들을 땐 '아하!' 싶었습니다.

 

 

Μ

 

버스를 내려 아파트로 들어오는 오르막 길에서 아주 작은 개미 수백수천 마리가 들끓는 모습을 두어 번 봤는데, K 교수는 그때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그것들을 들여다봤습니다. 그건 우리가 어렸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저 위의 어느 별에서 사무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우리를 보면 이것들처럼 보이겠지요? 저것들이 어딜 저렇게 다녀올까, 하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과학은커녕 학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나나 세계적인 물리학자라는 그나 '오십보백보'가 분명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의 빠르기보다 더 빠르게 그 크기가 팽창하고 있다는데 그런 우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그 작은 개미들의 행렬을 들여다보고 신기해하는 모습은 설명할 길 없는 정감과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하기야 그는 바닷속 미생물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서 매년 필리핀에서의 스쿠버다이빙을 낙으로 삼아 왔으니까 개미들에게 우정 혹은 애정, 동류의식 같은 걸 느끼지 말란 법도 없을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그의 블로그(https://www.flickr.com/photos/uwcwkim/)에 실린 수천 가지 바닷속 미생물 모습 중에서 두 장만 '슬쩍'한 것입니다.

 

 

 

 

Ν

 

"《철학자와 늑대》1라는 감동적인 책을 봤더니 글쎄 물리학자는 인간미가 아주 제로라던데요?"

그렇게 말해본 적이 있습니다.

 

뭐랄까,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는지, 어쨌든 그는 겸연쩍어 하며 잔잔한 미소만 지었습니다.

그 책에는 정말로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순수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을 제외하고는, 철학보다 인간미 없는 것을 생각해 내기 힘들다. 철학은 냉정하고 차가운 순수한 논리에 대한 숭배이다. 이론과 추상적 개념의 황량하고 얼음에 뒤덮인 산꼭대기를 거침없이 등정하는 의지이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실존과 결별하는 것이다. '철학자' 하면 나는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종일토록 대영 도서관에 앉아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집필한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이 떠오른다.2

 

 

Ξ

 

"인간미라면 순수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은 철학보다 더 메마른 학문이다, 그런 학문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려면 버트런드 러셀(글쎄, 그가 정말 그런가?)을 생각해보라!" 그런 말일 텐데, 나는 지금 실제적으로 이론 물리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노년기에 이른 한 학자를 눈앞에 두고 그의 인간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올해는 필리핀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산소통을 둘러메고 바다에 뛰어들 일을 생각했을 것이고, "인간미" 어떻고 했을 때보다는 아무래도 훨씬 더 난처하여 말을 꺼내기가 어렵긴 하지만 이젠 나이보다는 체력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건지도 모릅니다.

본인은 일단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그는 요즘 지난해보다는 더 쓸쓸해 보입니다.

 

추신 :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이 이야기를 그에게 그대로 전하는 좁쌀 같은 인물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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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크 롤랜즈 Mark Rowlands《철학자와 늑대》 THE PHILOSOPHER AND THE WOLF -LESSONS FROM THE WILD on LOVE, DEATH AND HAPPINESS (강수희 옮김, 추수밭 2016).
2. 위의 책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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