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 리만 Barbara Lehman
《나의 빨강책 THE RED BOOK》
미래엔 2009
단 하나의 글자도 없는 책입니다. 심지어 페이지 표시도 없습니다. '나의 빨강책', 빨강책일 뿐입니다.
오늘은 이 책으로 아이와 놀아보자, 생각했습니다. 교사로 태어나 교사로 살았고, 마지막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장'이라는 자부심으로 지냈습니다. 더구나 초·중·고 교과서 정책, 교과서 개발·심사·관리·연구에도 오랫동안 깊이 참여한 것 등, 교육에 관한 책으로 말하자면 제법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책으로써 아이와 놀아주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첫 페이지, 둘째 페이지입니다. 한 아이가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도심지를 걸어가고 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식은 죽 먹기'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당장 재미가 없다고 해버렸습니다.
"할아버지, 재미없어!"
('이럴 수도 있나!')
"재미없어?"
"응."
"……"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 아이가 지금 내가 이 그림책을 설명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는지 확인해보자는 건 아니지.'
이어서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네가 이야기해봐!"
"내가?"
"응."
아이는 좋아했습니다.
아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야기할 게 많아서 한참 걸리는 페이지도 있고,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페이지도 있고, '어? 왜 이런 그림이 나오지?' 싶은 페이지도 자연스럽게, 거뜬히 연결시켜 나갔습니다.
나는 그저 맞장구만 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저 사람이 등장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왔습니다.
나는 이 일을 아내나 며느리에게는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식을 퍼 먹이면 안 된다!'는 걸 주장하고 다니더니 꼴좋다!"고 하거나 "아이에게 좀 배우는 게 어때요?" 할지도 모릅니다.
교과서 중에 이런 책이 있으면 어떤가, 아이들에게 12년간, 그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수많은 것들을 일일이 설명해주는 교과서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지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무슨 교육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암담해질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한 일들에 대해 왜 그렇게 했어야 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께"
이 책 앞의 면지에 있는 헌사입니다. 저자인 바바라 리만이 그렇게 써놓은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떤 감사를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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