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내 제자의「궤도 이탈」

by 답설재 2021. 3. 3.

 

 

 

내 제자가 궤도 이탈을 했습니다. 경황 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수술을 하다가 동맥이 끊어져서 피를 많이 흘렸고 기억과 지능도 저하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십 년 전, 우리 교실 맨 앞자리에서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던 초등학교 1학년 그 아이, 어째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사정이 늘 안타까웠는데, 아이 아버지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기억력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영상통화를 해달라고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연전에는 내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했고 간간히 통화도 했지만 나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어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누구시죠?" "잘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듯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바로 "선생님~" 했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도 해서 '별 일 아니네' 싶은 느낌으로 "얼른 낳아서 만나자", "고생하시는 엄마하고 셋이서 맛있는 것도 좀 먹자" 별소리를 다하고 이번에는 그 어머니에게 뭐라고 했더니 아, 이런! 환자를 피하여 전화기를 들고 복도로 나간 그 어머니는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우선 장기가 아물지 않아서 금식 상태에서 이렇게 누워 있게 된 지 오래되었다며 철철 울었습니다.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내 걸 좀 떼어주고 싶다고 했더니 더욱 슬피 울었습니다.

'그 아이는 언제쯤 지구로 귀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죄가 많아서 교사가 되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사십 년 전 내 앞에 책을 펴놓고 앉아 있던 아이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살았습니다.

퇴임하고 병원 드나들지 말고 바로 죽었으면 되었을 것을 이런 꼴도 겪고 있습니다.

 

 

 

궤도 이탈

 

 

이해원

 

 

오토바이가 그를 발사했다 가로수를 들이받고 헬멧이 분리됐다 카운트다운이 생략된 찰나였다

 

506호 1번 침대, 목보호대가 몸보다 무거운 머리를 받치고 있다 호치키스로 세 개의 침을 머리에 박았다 저장된 정보들이 더 이상 바깥으로 새지 않는다 간호사가 탈지면에 신음을 닦은 뒤 석 장의 사진이 벽에 걸린다 뼈 사이로 펼쳐진 깜깜한 우주공간에서 경추 2번과 3번이 도킹을 시도했다 그의 발은 바퀴로 교체되고 팔은 철심으로 고정되었다 그이 비상식량은 튜브로 공급되는 5% 포도당, 그는 팔뚝으로 식사를 한다

 

횡단보도에 현수막이 걸렸다 제보를 기다리는 동안 침대에는 이름보다 큰 '절대안정'이 매달렸다 전화선을 타고 속속 날아드는 지상 관제소의 지시란 언제나 사소한 것들이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고요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 잡는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가끔 손가락이 찌처럼 꼼지작거린다 그는 언제쯤 지구로 귀환활 수 있을까

 

 

 

───────────────

이해원 1948년 경북 봉화 출생. 2012년 『세계일보』 등단(심사위원:신경림, 유종호).

 

 

 

9년 전 『현대문학』(2012년 4월호)에 실린 이 시를 다시 보다가 삶의 정상 궤도를 이탈한 내 제자를 생각했습니다. 하루에 몇 번씩 문득 문득 그 아이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사진을 모아 둔 파일을 뒤적이다가 그가 내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키가 작은 나를 안고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땐 좀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도 좀 언짢았는데(이놈의 짜석이 감히 나를 끌어안다니! 고약한 넘!) 이제 오늘은 괜찮습니다. 다 나으면 다 용서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옥관 「질문들」  (0) 2021.03.15
「풀 잡기」  (0) 2021.03.09
「버스를 타고 나에게로」  (0) 2021.02.19
유혜빈 「카페 산 다미아노」  (0) 2021.02.10
조영수 「눈 내린 아침」  (0) 2021.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