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산 다미아노
유혜빈
영원에게 말한 적 있다 시월 마지막 날 정동에 다녀오자고 돌담길 지나 있는 카페 바깥에 앉아나 있자고 커피나 대충 시켜놓고 휴지에 아무 글자나 끄적이고 있자고...... 아니 가본 건 아니고요 가을에 꼭 가봐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데요...... 이름이 산 다미아노...... 라는데요...... 그는 기어코 잊어버리자고 만든 약속을 기억해낸다 나는 당황스럽게 풍족해진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영원과 상관없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우린 눈 감을 때마다 걷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생겨났다 조금 멀리 왔구나 알게 되면 영원은 돌아가야 할 것이다 걸어온 길을 따라 돌아가야 할 테니 영영 까먹어버리면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일부러 눈을 자주 문질러주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아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딴청을 피울 수밖에 방금 만든 노래를 부를 수밖에 영원이 저물어가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마지막으로 말해야 했다 그에게 어울리는 음들을 모아 전하고 싶었다 오늘 꼭 산 다미아노에 가지 않아도 좋아...... 말하는 순간 횡단보도 위에 프란치스코교육회관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옆 카페 산 다미아노 산 다미아노 선반 위 하얀 커피 잔에 담길 물이 영원히 끓어오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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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빈 1997 서울 출생. 2020년 《창작과비평》 등단.
"카페 바깥에 앉아나 있자고"
"커피나 대충 시켜놓고......"
그 시절은 얼마나 구차했던지 아니 그 시절은 얼마나 찬란했던지......
《현대문학》 2020년 12월호에서 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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