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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내 곁을 서성거리는 고독 (2014.1.16.목)

by 답설재 2014. 1. 19.

 

 

 

 

 

 

자잘한 것들이지만 다행한 일, 잘된 일이 거듭된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녁에는 적막하고 고독하다는 느낌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날이 처음인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당연히 더 자주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이처럼 고독한 날이 다가오는 걸 미리 알고 기다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또한, 이런 날들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 이런 날들을 즐기게 된 것을 참으로 고맙게 여깁니다.

 

 

 

 

아내가 모처럼 건강검진을 받은 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주제'는 '아내의 건강검진'이었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다른 일정은 잡지 않았고, 오후에는 그냥 쉬기만 하면 되는 걸로 정했습니다.

 

아내가 건강검진을 제대로 받아본 것은 7, 8년은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음 편히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가 조금만 불편하다 하면 '이러다가……' 싶기 일쑤였고, 죽을 고비를 넘긴 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건강검진에 소홀한 자신의 태도를 한심해하곤 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안내하는 동네 병원의 정기적인 건강검진은 잘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에서 질병에 관한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불안감이 일었고, 그럴 때마다 '언제 종합적인 검진을 받긴 받아야 한다'고 벼루긴 했지만, 늘 막연한 계획이었고 그때뿐이어서 금방 잊어버린 채 또 몇 달, 또 몇 달, 그러다 보니까 금방금방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간 것입니다.

 

막상 시시콜콜 체크해야 하는 '문진'인가 뭔가를 작성하다 보니까(아내의 것도 이런 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고장 난 곳도 없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생돈 들여 괜한 사람 고생만 시키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검진은 내 형편으로는 큰돈을 들여 특별히 마련한 '선물' 같은 것이니까 헛돈을 쓴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덜컥 고장이 난 뒤라면 건강검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습니다. 7시 20분이 예약 시간인데 6시 50분경에 도착해서 하릴없이 기다렸습니다. 늦장을 부린다고 아내가 못마땅해 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렇게 일찍 도착한 것입니다.

새벽 4시, 아내가 일어났을 때 나도 잠을 깬 것은 잘한 일인데, 이 일 저 일로 시간을 보내다가 6시에 출발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10분 정도 늦추어진 것입니다. 아내는 병원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고, 그게 마음에 거슬린 나는 늘 다니던 길을 더듬기까지 했습니다.

 

일찍 도착해봐야 그렇게 기다려야 하고 별 수도 없어서 단 10분이라도 더 자거나 편안하게 있다가 가는 게 나은데도 아내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찍 도착해서 마음의 준비도 하고, 혹 일찍 도착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게 되면 그걸 놓쳐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인 것입니다.

"지금 가도 아주 일러!"

"일찍 가봐야 별 수 없다니까!"

"그 사람 참! ……"

그렇게 언성을 높일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참았습니다. 대장내시경 때문에 어제저녁과 오늘 새벽에 약품을 탄 물을 3리터씩이나 마신 그가 안쓰럽기도 했고, 평생 그렇게 높인 언성을 오늘 하루 참는다고 병이 되거나 손해 날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내 일에만 빠져서 지낸 수십 년 간 저 사람이 저렇게 서두르며 살아온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라도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드디어 7시 20분, 전광판의 순서대로 접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접수래야 검진에 걸리는 시간을 안내하고 대금을 계산하는 것뿐이지만, 마침내 내가 생색을 낼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난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직원이 내 카드를 두 번이나 긁었지만 그동안 순조롭기만 했던 그 카드는 그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직 기한이 되지 않아서 지난달 카드 사용 대금을 지불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다른 카드를 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 카드 외에 다른 카드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집에 돌아가 아내가 사용하는 카드를 찾아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동안 건강검진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혼자 집에 돌아왔다가 정신을 차렸고, 현금으로 계산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은행의 자동인출기에서 현금을 마련해서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아내의 카드를 사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다행한 일이 여러 가지였지만 아내도 그렇게 생각해 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섯 시간이나 걸린 검진이었지만 아내는 그렇게 지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도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간식을 받아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안동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이 보낸 택배 꾸러미가 있어서 얼른 열어봤더니 그 시인의 마음 같은 물건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맛이 진할 것 같은 색깔의 사과 네 개, 양동엿!

 

나는 음식물 중에서는 사과를 으뜸으로 치는 사람이고, 아내는 엿을 참 좋아합니다. 수십 년 엿을 즐겨먹다가 마침내 그 습관이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는 자제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좀 굶었고 게다가 지친 상태니까 "까짓 거 한 번쯤이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내는 당장 그 엿을 절반이나 먹어 치우고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져 오후 내내, 저녁 내내 저렇게 자고 있습니다. 의자 소리만 나도 잠이 깨는 사람인데, 내가 좀 졸다 일어나 저녁식사를 하고 헬스장을 다녀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저대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김원길 시인이 때맞추어 피로회복에 좋은 저 양동엿을 보낸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며, 나에게는 참 다행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나는 지금 적막감에 싸여 있습니다. 이 아파트는 언제나 이렇게 조용하기도 하지만, 오늘 같으면 나는 외롭기도 하고, 심지어 고독하기도 하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거 참 큰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조용하거나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고독은 그것을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이길 수만 있으면 언제나 '좀 즐거운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아내와 나눈 몇 마디 대화 외에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은 것입니다. 좀 정리해서 말한다면, 오늘 내가 죽었거나 저 사람이 죽었다 해도, 우리 둘 중 남은 하나가 밖으로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날이 자꾸 있게 될 것입니다. 더 늘어나 더 자주 있을 것입니다.  고독은 내가 어떻게 하는가 보려 할 것이고, 그러다가 '이때다!' 싶으면 당장 다가오려고 내 주위를 늘 서성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지 모릅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리 와 봐."  "…………"  "여기 좀 앉아 봐."  "…………"  "어때? 아니, 내가 어떠냐고? 자네를 맞이하는 나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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