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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제자들 생각

by 답설재 2014. 2. 2.

이 제자는 38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제자"라고는 하지만, 그해 9월 15일에 내가 그 학교를 떠났으므로1 여름방학 기간까지 합쳐서 겨우 6개월 반 동안 담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속 그날들은 지금도 생생하고, 그런 날들의 아침에 일찍 등교해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표정도 떠오릅니다. 학교에서는 내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겨서 그때 나는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연구학교 보고서도 써야 하고, 시범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교장실·교무실·현관과 복도 환경도 꾸며야 하고, 화단도 보기 좋게 가꾸어야 하고, 연구학교니까 행사도 자주 개최해야 하고, 개인별로는 교무주임 부탁으로 함께 무슨 학습자료도 제작해야 하고, 전국 현장교육연구대회에 낼 보고서도 써야 하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최소한으로는 가르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둠침침한 분위기는 감쪽같이 감춰버리고 기억 속의 그 아이의 함초롬한 모습만 꺼내어 그림을 그려 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할 재주가 없습니다.

 

 

 

 

"제자, 제자" 하고, "아이, 아이" 하지만 그 아이들이 지금은 중년입니다. 마흔이 훨씬 넘었거나 쉰이 넘은 축도 있습니다.

그저께는 어느 '아이'가 내 거처를 알아내어 전화를 했고, 내가 대뜸 알아보자 서로 간단한 안부를 묻고 대답하는 내내 훌쩍였습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 같은데도 그렇게 눈물을 흘렸고, 더구나 내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리는 게 가슴 아팠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다르지 않으므로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눈물 흘릴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그 눈물을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그 아이를 마주하고 있다면 그 눈물을 닦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그냥 두고 싶었던 이유는, 이제는 그렇게 눈물을 닦아주는 일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뿐이긴 하지만, 그 아이가 예전 일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며 오늘 그렇게 눈물을 흘려도 좋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담임선생님'이라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고 대단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지금은 나 자신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처지가 되어 그렇게 눈물이나 닦아 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있을 뿐이지만, '선생님'이라는 것은 겨우 그렇게 막(幕)을 내릴 수밖에 없는 허무한 것이어서 오늘날 21세기의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생님", 혹은 최소한 "사장님" 등으로 "선생님"보다는 더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 나의 이 가슴은, 이 가슴속의 내 눈물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교육부와 교육행정기관에서 근무한 기간이 길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제자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는 아이들은 심심찮게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지만 그 '제자'라는 것이 내게는 참 기가 막히는 것이구나, 싶은 것입니다. 뭔가 하면, '그때 그 선생이 나를 잊어버렸겠지? 잘된 일이지 뭐.' 그럴 아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 중에서 '어려움'이 뭔가를 알거나 느끼는 단 한 명이라도 "살아오면서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면, 아니, 그렇게 말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생각만이라도 하고 있다면, 나는 그만 내가 살아온, 살아오며 겪었던 그 어려움들, 서러움들, 고난들, 그러므로 나의 만사(萬事)를 다 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게도 남은 눈물이 있다면 그걸 좀 흘려도 좋을 그런 이유들이 눈 녹듯 다 분해되고 증발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아도, 어렵사리 찾아오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아니, 그 아이처럼 굳이 전화를 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아주 영 잊어버리고 있는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아이가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잠깐이라도 나를 그리워해 주었다면 나는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찾아오면 뭘 하겠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찾아오면 좋고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는 거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내 말은, 다만 그 아이들 중 한둘이라도, 특히 그 시절에 어려웠거나 아니면 어떻게 하다가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나서 문득 나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순간이 있다면,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주 자랑스럽다는 뜻입니다. '교사'라는 사람은 한때 "선생님!" 하고 불렸으므로 이 세상 어느 곳에 문득 그리워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긍지, 자존감을 충분히, 가득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제자는 내 걱정을 많이 해주고, 자주 연락을 하니까 ―흡사 그 당시에 내가 저를 그렇게 대한 것에 대해 이번에는 자신이 그렇게 해주겠다는 듯해서― 나로서는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누가 나에게 그렇게 해주겠습니까? 지난해에는 이 월간지에 한 페이지 실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살다보니까 별 일 다 있습니다.

 

 

 

 

우리 이야기가 실린 잡지의 표지

 

 

 

 

 ▽ 기자가 써 준 우리 이야기

 

 

 INTERVIEW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 선생님'을 만나다

아득한 기억 속 어린 시절 소꿉동무들, 특별히 귀여워해주시던 담임선생님 등 나이가 들어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그렇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웃음을 잃은 자신을 다시 웃게 만들어준 은인이자 뭘 해도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선생님 덕에 '나도 소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이 교육청으로 전근을 가면서 그 후로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단 한순간도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다 지난해 초등학교 방과후 교사로 학교에 나가게 되면서 교감 선생님에게 우연히 선생님 이야기를 했다가 글을 잘 쓰는 분으로 기억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혹시나 신문에 칼럼 기고라도 하지 않았을까 싶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선생님 성함을 쳐보았다가 선생님이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방명록에 글을 남겼고 선생님은 "그럼, 기억하고 말고…"라는 답글을 달았다. 선생님은 전근 가던 날 집에 찾아와 엉엉 울었던 일부터 자주 입던 옷,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모습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드디어 작년 겨울, 38년 만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머리만 백발로 변했을 뿐 차분한 음성도, 따뜻한 미소도 38년 전과 똑같은 선생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제자가 자기를 꼭 닮은 딸을 데리고 나타났는데 반가우면서도 기분이 묘하더라며 그날을 회상했다. 예상대로 옛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는 선생님에 이끌려 서점으로 향했다. 선생님께서 열네 살 막내딸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어 미리 추천도서 몇 가지를 골라놓은 것이다. 혹여 길이라도 잃을까 막내딸의 손을 꼭 잡고 메모지에 적어 놓았던 책들을 일일이 찾아 설명해주시는 모습이 꼭 자상한 외할아버지 같았단다. 요즘도 선생님과 블로그, 전화로 안부를 전하며 오랜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선생님과 기쁨을 나누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열두 살 소녀로 돌아가 선생님께 이르듯 이야기하기도 한다.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가만히 들어주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전부지만 그만한 위로가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조건 없이 내 편을 들어주는 든든한 사람, 학교에서는 바른 성품을, 어른이 되어서는 묵묵히 지켜봐주는 평생의 은사(恩師)님과 함께하리라.

 

 

 

                                                                                                                                                   

우리 이야기가 실린 페이지

 

 

* 그 지역교육청 교육장이 나에게 자주 교육청 일을 시키다가 아예 교육청 파견근무를 결정했는데, 그 학교가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로 9월 15일이 전국 공개보고회 날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날 다른 반은 모두 '일반수업'이라는 걸 하고 우리 반만 '시범수업'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날 그 공개보고회를 마치고 이튿날 당장 교육청 일을 하러 간 것입니다. 교육청 일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가령 교육장이 각 학교를 방문해 보고 잠물쇠로 잠근 서장 속의 책이 아무도 읽지도 않은 채 보관되는 걸 보고 '이 책들을 꺼내어 복도에 내 놓으라!'고 하면 교장들이나 장학사들이 모두 반대를 했는데, 나 혼자 '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했으므로 그 교육장은 나에게 '김 선생이 복도 개방형 서가 운영 계획을 세워 보라'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교장이나 장학사들은 '그렇게 하면 책이 다 없어진다'고 이구동성으로 불평했고, 나는 '다 없어져도 아이들이 읽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한 것인데, 그 교육장은 내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는 아예 그런 인간이었고, 아직까지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