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7월호 갈피에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연두색 종이여서 눈에 띄었으므로 편지부터 읽었습니다.
편지조차 공개하면 그는 일단 놀라워할 것 같고, 이렇게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 저것 따질 형편이 아닙니다. 나이대로라면 "아직 새파란 주제에……" 꼴 같지 않다고 여길 사람도 많겠지만, 나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건 뭐라고 할까, 약속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이 편지를 다 읽었다고 버릴 수 없고, 그렇다고 어디 넣어서 끌어안고 다닐 수도 없고, 잘 보관한다고 해봤자 별 수 없다는 건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고, 여기 실어두면 안전할 뿐만 아니라 무슨 증거 같은 것이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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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작가가 되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이제 실제로 나보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건 '선생'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감정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럼 됐다. 주부작가가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내가 나서서 공박하고 싶은 평가입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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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열심히 해서 박경리나 제인 오스틴 같은 작가가 되라는 뜻이냐고 물으면, 글쎄요, 꼭 그렇게 되라는 기원도 아닙니다. 결코 그런 작가가 되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닙니다.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혹 압니까?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고, 후에 《스웨덴 연설》을 하면서 5세에 입학하여 만난 벨꾸르 공립학교의 루이 제르멩 선생에게 그 연설을 바친 것처럼 그가 무슨 큰 상을 받게 되면 수상 소감을 이렇게 이야기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게 다 초등학교 때 만난 ○○○ 선생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 길이 너무나 아득하고, 그래서 힘이 이만저만 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랄까, 젖 먹던 힘 정도로는 되지 않고, 그야말로 모든 것 내어놓고 목숨 걸고 총칼 들고 나아갈 때처럼 그렇게 가야 하는 길 아닌가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그 고운 '아이'에게 그렇게 하라고까지 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하면, 글쎄요,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적당히 두드러지고 참 좋은 글 쓰고 그러면 되겠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러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초등학교 때 글쓰기 좀 가르친 선생에게는 그것까지 다 가르칠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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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의 여자」를 읽어봤습니다.
시작부터 무슨 단편소설의 첫머리 같았습니다. 긴장감도 느껴지고 낱말도 정선되어서 장면이 바뀌는 부분 말고는 거치적거리는 부분도 눈에 띄지 않아서 흐름도 매끄러웠습니다.
지난해에 추천을 받을 때보다 더 나은 것 같고, 적어도 그때의 글보다 못하진 않구나 싶었습니다.
다만 글로써 누구를──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가르치려고 들진 않았으면……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에게 배우는 걸 싫어합니다. 저절로 배우게 되는 건 아무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문'과 '문 앞의 여자'라는 제목도 웬지 좀 현학적(衒學的)이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생각이 신선하고 수준이 높고 두고두고 생각해볼 만한 소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런 느낌은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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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마치려고 하니까 좀 생각이 구체화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하면, 그는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그가 유명한 이유는, 그의 글을 읽으면 사람들이 왜 그런지 몰라도 착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이 세상이 참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오늘 저녁에도 시간을 내어 책을 좀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고, 하여간 그런 이유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래서 어디 교보문고 같은 곳에서 그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작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의 글과 함께 그의 따듯한 인간성이 알려져서 더 좋은, 곱고 아름다운 그의 내면이 다 드러나는 그런 작가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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