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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소극적으로 살기의 즐거움

by 답설재 2012. 7. 10.

전에도 소개한 적 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버트런트 러셀은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라는 글에서 지겨운 사람이 되는 갖가지 방법들과 그것을 피하는 방법들을 정리해 일곱 권으로 된 학술논문을 쓸까 생각 중이라고 너스레를 뜰고 난 다음, 그 일곱 가지 부류의 기본에 속하는 사람으로 ❶ 계속되는 변명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❷ 지나친 근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❸ 스포츠 이야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을 들었습니다.

 

그가 그 다음으로 든 지겨운 사람은, ❹ 현학적인 태도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❺ ( ), ❻ 허풍, 즉 자화자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말하자면 ‘속물’, ❼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 최악의 부류로 거의 예외 없이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여성들이여! 어쩔 수 없이 인용합니다. 미안합니다).

❺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겹게 하는 사람입니다. 러셀은 그들을 추억에 잠긴 나이 지긋한 신사들이라고 하면서 그 신사들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이런 일이 생각나는구먼.”

 

아, 정말! 그렇게 하여 남을 지겹게 하는 사람으로 남지는 말아야 하는데……

 

 

 

<사례 ①>

 

누가 교과서에 대해 묻습니다. "옛날에는 국어 교과서 이름이 '국어'가 아니었나요?"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도 '국어'였지요. 다만 맨 처음 나온 초등학교 국어책만 '바둑이와 철수'였을 걸요?"

 

그렇게 대답하면 참 좋을 일을, "이때다!" 혹은 "심심하던 차에 너 잘 걸렸다!" 하고 일장 연설을 시작하기가 쉬운 것이 노인(늙은이)입니다. 그렇게 하고는 "묻기에 대답해 주었다" "친절히 안내했다"고 호도합니다.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다보면 10분, 20분, 30분이 넘기도 합니다. 체면상 잘 들어주는 것을 재미있게 듣는 것으로 착각(호도)하고, 끝없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사(史), 국정 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 음운정책, 국어교육과 민족주체성교육, 국한문 혼용 문제…………

 

 

 

<사례 ②>

 

일장 연설과 달리, '요즘 것'들이 하는 짓은 영 아니라고 핏대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국어 교과서의 이름이 아직도 '국어'라니! 가관이야. 옛날에 우리가 그렇게 해놓았더니 아직도 무턱대고 그 이름을 쓰고 있지. 국어는 '국어', 수학은 '수학', 심지어 '수학익힘책', 과학은 '과학'…… 에이, 형편없는 것들!…… 다른 나라 교과서 이름을 보면 그렇지 않아. 좀 살펴보고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고 그 교과목 공부의 방향도 암시하도록 창의성을 발휘하고 그래야지, 뭐 하는 것들인지, 원!"

누가 보면 국어 교과서 이름이 옛날에도 '국어'였는지 물어본 바로 그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양 그에게 퍼부어 댑니다.

 

 

 

우리가 퇴임을 했는데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세월은 더 잘 흘러갑니다. 세상 만사(萬事)가 다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혹은 '내가 빠지니까 더 잘하는구나' 하고 쑥스러워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세상이 이처럼 잘 돌아가는데 노인들은 왜 저렇게 못마땅해하나?' 싶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퇴직자들에게, 노인들에게 묻지 않고도 잘 하고 있으니까 우리 퇴직자들은, 노인들은 멋쩍어지고 쓸쓸합니다.

거리에 나가서 살펴보십시오. 남자 노인들 표정이 쓸쓸하지 않은가.

여자 노인들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분해서 독이 오른 것 아닌가 싶은 노인들이 많이 보입니다. 젊은이들이 도통 묻지를 않으니까 그런 건 아닐까요?

 

사실은 물을 것도 없습니다. 마늘까기는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자세히 알기 쉽게, 친절하게 다 설명해 놓았고, 매실 효소 만들기도 너무나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니, 마늘까기 정보도 필요 없습니다. 아예 다 까서 판매하니까 돈만 있으면 되고, 대형 매장에서는 컴퓨터 자판기 위에서 "부디 손가락만 까딱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합니다. 다 배달해 주겠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땐 마늘 다 까서 먹고도…………"

그런 소리 하면 되겠습니까? 옛날로 돌아가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자는 얘기는 아닙니까?

노인의 지혜가 필요한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봐주는 일에는 노인이 제격입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노인들의 생각도 분명합니다.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자신의 전문성과 경험을 존중하여 물을 걸 묻고 우러러보는 것은 좋지만 "애만큼은 절대로 봐주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그 결심을 다른 노인들도 수용하도록 동료들에게 종용하는 노인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건 애를 낳지 않고 그냥 살겠다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과 관계 깊은 현상일 것 같지 않습니까?

 

 

 

이야기가 옆길로 갔습니다.

 

우리 퇴직자들은, 노인들은, 세상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젊은이들에게 인터넷에 들어가지 말고 우리에게 물어보라고 하는 건 이미 '물 건너간 일'입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속이 편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래도 적극적으로 살겠다"면서 엘리베이터도 악다구니로 타고, 전철을 탈 때도 앞사람, 옆사람을 밀어붙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리를 잡고, 수 틀리는 사람 눈에 띄면 욕설부터 늘어놓고, 어떻게 하든지 더 오래 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좋은 것 챙겨 먹고, 다 집어치우고 스포츠댄스나 훌라춤, 살사춤도 배우고……

그러면 청춘이 되돌아올 것 같습니까?

 

아예 좀 소극적으로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나 아니라도 잘 되겠지.'

"아니, 나는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나 혼자 살아갈게.'

"좋은 일은 너희들이 다 해. 혹 남는 게 있으면 내가 할게."

…………

 

 

 

<연습문제>

 

어느 멋진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습니다. 어디에 있는 어느 호텔이냐, 어떤 행사냐, 도대체 무슨 일을 맡은 봉사활동이냐, 그런 건 묻지 마십시오. 하여간 당신은 퇴직자입니다. 말하자면 현직들의 행사장에서 봉사활동을 해주는 역할이 당신의 역할입니다.

 

뭔가 일을 좀 하다가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며 서 있는데, 저쪽에서 행정기관에서 나온 몇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얼굴을 알 듯한 과장(혹은 차장, 혹은 장학사, ……)도 보입니다. 좀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러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저~ 업무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거지요.

………………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① "아, 미안합니다." 얼른 사과하고 돌아선다.

② "옛날에 업무협의 해보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하고 비아냥거린다.

③ "나도 업무협의에 좀 참여합시다!" 하고 호기롭게 이야기하며 끼어든다.

④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쑥스러워하며 어디로 숨는다.

⑤ 어디 내 마음을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푸념을 늘어놓거나 분개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래도 그렇지!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 어디서 함부로! 옛날 같으면 ……………………"

 

버르장머리는 다가간 쪽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옛날이 아닙니다. 봉사활동을 하려면 그들이 업무협의를 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봉사활동도 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늙은이가 된 것입니다.

 

위의 ①②③④⑤는, 나도 몇 번을 고를까 망설여집니다. 답은 딱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일 수도 있고, 저 중에 없을 수도 있고, 이런 경우의 답은 아예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도 참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한때 저만큼 적극적으로 일한 사람이 있으면 좀 나와보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다만 '이젠 소극적으로, 즐겁게 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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