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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by 답설재 2011. 11. 25.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11

 

 

 

 

위트에 가득 찬 에세이집입니다. 영어를 일상적으로 읽지 못하는 한탄스러운 처지여서 번역본을 읽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스스로 안타깝지만, 원본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더 시원하고 행복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위트란 이런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 허용되는 직업들은 수준 높은 사기를 쳐야 하는 직업들에 비해 대체로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법인 변호사나 부패한 정치가, 인기 좋은 정신과 의사는 도덕적 견해를 아주 정직하게 매우 자주 발언하리라는 기대를 받지만, 이 고된 일의 대가로 적절한 보수를 받기 마련이다.

 

(176쪽, 「진정한 도덕과 교화의 차이 on Being Edifying」 중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비밀만 보장된다면, 저도 당장 지금도 그렇게 수준 높은 사기를 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변호사나 정치가, 정신과 의사의 예를 들고 싶은 심정이 간절합니다.

 

온갖 일에 끼어드는 그 변호사, 한결같이 느글느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변호사, 자신의 손을 거치면 세상에 개선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처럼 으스대는 그 변호사, 그럼에도 이 세상이 그의 호언장담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 짓을 멈추지 않는 그 변호사, 그래서인지 도대체 늙지도 않는 그 변호사, 내가 죽어 나자빠져도 쌩쌩하게 살아 있을 그 변호사.

 

'부패한' 그 정치인은 언급도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정치와 교육만 더 좋아진다면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는 -저로서는 간절할 것 하나도 없는 일이지만- 선진국 문턱이 훨씬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 정신과 의사는, 생각납니까? 저는 그 녀석이 전혀 신통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증거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느 정신과 의사보다 하나도 더 나을 것 없는 그가 수많은 책을 써서 다 팔아먹고, 요즘도 인터뷰 기사는 신문 지면을 가득가득 채웁니다. 세상을 걱정 없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복안을 가진 것처럼 여유로운 말을 늘어놓는 꼴이란…………

 

 

 

 

속이 시원한 이 에세이들을 쓴 사람은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그는 1931년 7월 22일부터 1935년 5월 2일까지 일주일에 한 편씩 고정적으로 156편을 신문에 기고했다는데, 이 번역본에는 135편이 실려 있습니다.

 

질투에 관하여 섹스와 행복 관광객의 미스터리 노인을 위한 나라 마음만 먹는다면 립스틱을 발라도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경험에서 배워야 하는 것 돈을 향한 희망, 돈에 의한 공포 …………

 

 

 

 

교육에 관한 에세이 중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보입니다. 지금도 학교교육을 연구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혹은 젊은 날 저와 교육적 견해가 달랐던 그 누군가에게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혹은 제가 교육부 편수관일 때 저와 견해가 달랐던 그 학자 또는 교수에게 지금이라도 연락하여, 혹은 제가 교장일 때 이런 것들을 강조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논리가 생각나지 않아서 안타까웠을 때의 그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소개하고 싶은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이야기한 그대로가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 저의 세계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떠나 왔기 때문이며, 저는 그들을 영영 만날 수가 없는 허상(虛像)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착한 아이 나쁜 아이 on Being Good」이라는 에세이에서 골랐습니다.

 

오늘날 성인들의 세계는 '나쁜' 소년의 특징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년, 영국의 해군 제독으로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은 죽는 날까지 나쁜 소년이었고 줄리어스 시저도 그랬다. …(중략)… 불행하게도 순종은 진취적이거나 리더십이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바보─아마 로마인이었을 것이다─가 명령하는 법을 알려면 먼저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과 정반대다. 복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진취성을 몽땅 잃어버릴 것이다. 아니면 권위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다 결국 그 진취성이 파괴적이고 잔인한 설질로 변해버리거나.(79)

 

다른 에세이를 좀 인용할까 하다가 위에서 인용한 에세이의 마지막 부분을 옮기고 싶어서 우선 그 부분을 보여드립니다.

 

현대 세계에서 조직이란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니 요직에 있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젊은이들의 기발한 행동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 말고는 이 문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중요해진 사람을 개선할 수 있는 희망이란 없다. 그는 더 이상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을 발전시키는 일이 일반적으로 이미 늙고 이미 중요해진 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는 학교에서는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이 책임자 자리를 맡아선 안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훌륭한 개혁안이 채택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80~81)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교육이 아이들의, 젊은이들의, 기발한 행동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우선 떠들지도 못하고, 사뿐사뿐 발뒤꿈치나 들고 다녀야 하고, 청소나 깨끗이 해야 칭찬을 받는 학교, 그런 학교라야 "가고 싶은 학교, 머물고 싶은 학교"라는 팻말을 써붙일 수 있는 학교에서 무슨 창의력, 진취력이 발휘되겠습니까.

 

아! '학교에서는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책임자 자리를 맡아선 안 된다'고 했으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이걸 뭐? 훌륭한 에세이라고?" 노발대발할 분이 부지기수이겠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아, 버트런드 러셀이 이야기한 학교란 우리와 환경이나 여건이 영 다른 영국 같은 나라 이야기이고, 그것도 1930년대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관점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 교육!

 

 

 

 

나도 어느 작은 신문에 정기적으로 '시론'이라는 걸 싣고 있지만 사실은 '시론'이 뭔지도 모른 채 쓰고 있습니다. 아마 '나보다 못한 놈들도 저렇게 많이들 쓰고 있는데 더구나 이까짓 어쭙잖은 지방지에쯤이야……' 싶은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한 건지도 모릅니다. '에세이란 이런 거야.' 제가 러셀이라면 그렇게 말하며 예를 들 만한 글을 한 편만 보여달라고 할 때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What to Believe」(478~480쪽)라는 글을 고를 것입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주제에 관해 하나의 의견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다른 이들의 말을 믿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혼자 힘으로 그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인류의 압도적인 다수는 첫 번째 방법을 쓴다. 그 나머지 인류의 압도적인 다수는 두 번째 방법을 쓴다. 나머지 극소수만이 세 번째 방법을 쓴다.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저는 감탄을 했고 밑줄을 쳤고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아서 다른 색 볼펜으로 그 부분에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저는 그 에세이에서 기억해 두고 싶은 네 부분을 가려 두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선 범세계적으로 의견 일치를 볼 수 없는 지역적 의견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그런 경우에 범세계적인 만장일치가 없음을 알리는 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의심해보도록 하는 일이 교육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반항의 한 수단인데, 일반적인 실행 방법으로는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2 곱하기 2는 4라는 사실, 또는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에 대해서조차 상황에 따라 많든 적든 어느 정도 의심해보는 것은 현명한 태도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실을 증거에 따라 그리고 증거가 보장하는 만큼 확실하게 믿는다면, 나아가 그 믿음을 견지하면서도 오류를 발견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 행동한다면,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이다.

 

 

 

 

러셀의 문장은 기가 막히게 유려하다고 합니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확인했습니다. 이 비교적 두꺼운 책이 이만큼 번역된 것도 저로서는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몇 달만 더 읽고 윤문 해 주었으면 싶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서는 새빨간 거짓말만 아니라면 정중함이 반드시 거짓된 인상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522)

 

좋은 책인데도 험담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영어를 우리글처럼 읽지 못하는 서러움? 억울함? 그런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힌 넋두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억울함'이라고 하니까 생각납니다. 좋은 책을 소개할 때마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입니다. 제 글을 읽고 그 책을 구해 읽는 사람은 있을 것은 분명한데도 아무도 그렇다고 하지는 않는 점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합니다. 그 예외가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자신을 몰라주는 상대방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 블로그 독자 중에 저와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육을 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좀 읽어 보면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