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김인환 옮김, 민음사 2011
이 작가는 1996년 초봄에 사망했는데 그 즈음 『이게 다예요』라는 작품이 소개되었다. 도대체 어떤 작가인가 싶어 그 얄팍한 책을 구해 보고 실망한 기억이 있다. '이게 다라니! 도대체 무슨 얘기야?'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작품 《연인》(1984)으로 콩쿠르 상을 받고, 1986년에는 "영어로 출간된 올해 최고의 소설"이라는 찬사와 함께 리츠파리헤밍웨이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 이른바 '성적 수치심' '에로이즘' 같은 건 해당되지도 않는다 해도 -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 때문에 중·고등학생들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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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베트남) 현지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조차 세상을 떠나자 살림살이와 세 자녀가 중압감을 주어 성격이 사나워진다.
소녀는 어머니와 큰오빠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 열다섯 살의 이 소녀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때 부유한 집안의 중국인 남자가 나타난다.
그 남자를 사랑하거나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아무런 생각이나 설명도 필요 없이 그 만남에 빠져들었고, 어머니의 욕설이나 주위의 따돌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섹스 행각을 벌인다.
그러다가 소녀는 아무런 미련없이 헤어져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고, 어느 날 그 배의 응접실에서 울려 퍼지는 쇼팽의 왈츠를 들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콜랑에 두고온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제 그 남자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쇼팽의 음악이 들리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음을 안타까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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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인간의 원초적 '슬픔'에 관한 소설일까? 욕망, 욕망의 굶주림, 슬픈 욕망...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난파선 같은, 비탄의 장소이다. 그는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만약에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나를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가 자신을 억제하려 애쓰는 것을 본다. 이윽고 그는 어머니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걸 수치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는 결혼을 하게 될 경우 그런 선입관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를 본다. 그도 나를 본다. 그는 담담하게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중국인이야." 우리는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에게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슬픈 감정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냐고 묻는다. 그는 우리가 한참 더운 대낮에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또, 항상 끝나고 나면 비참한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는 미소를 짓는다. 그가 말한다. "서로 사랑을 하든 사랑을 하지 않든, 항상 비참해.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밤이 오면 그런 감정은 사라질 거야." 나는 그에게 그 슬픔이 꼭 낮 동안의 정사 때문만이 아니라고,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 준다. 나는 지금 내가 줄곧 기다려 왔고 또한 오직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그런 슬픔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어머니가 얘기하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방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한다. 어머니는 마치 신의 사자(使者)나 되는 것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악을 쓰며 말한다고. 어머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신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고함을 친다는 걸 그에게 말해 준다(56~57).
지금까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세 작품 『모데라토 칸타빌레』 『내 사랑 히로시마』 『연인』을 읽었다. 세 작품의 성격이 서로 다른가? 잘 모른다. 다만 특히 『내 사랑 히로시마』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교육적인 관점이 필요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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