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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

by 답설재 2011. 11. 3.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

이용주 옮김, 동문선 2005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입니다.

 

시놉시스(synopsis 영화의 개요, 의도))에서 이 영화의 성격이 될 만한 부분을 골랐습니다.

 

우연히 만난 커플의 모습은 영화가 시작될 때 보이지 않는다. 여자도 남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 대신에 머리와 허리 부분이 잘린 듯한 사랑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차례차례 잿더미와 이슬 방울, 원자폭탄의 분진으로 덮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사가 끝난 후의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 같은 육체가 움직이는 장면이 보인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순전히 미국의 입장에서 그것도 1945년을 고스란히 상기하며 설명한다 해도 "참 잘 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부분입니다. 주인공인 남자는 일본인, 여자는 프랑스인입니다. 지금 두 남녀는 침대에 있습니다.

 

 

서로 껴안은 두 어깨는 피부색이 다르다. 한쪽은 짙고, 다른 한쪽은 옅은 색이다.

퓌스코의 음악이 거의 충격적인 포옹에 이어진다.

두 사람의 손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퓌스코의 음악이 멀어진다. 여자의 한쪽 손이 황색 어깨 위에 놓인다. 놓여 있다기보다는 움켜잡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무디고 조용하며 암송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여자  나는 모든 걸 보았어요. 모든 것을.

          병원, 나는 병원을 보았어요. 확실해요. 히로시마에 병원이 있어요. 어떻게 병원을 보지 못할

          수가 있겠어요?

남자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병원을 보지 못했어요.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여자  박물관에 네 번이나……

남자  히로시마의 어떤 박물관에?

여자  히로시마의 박물관에 네 번이나 갔었어요. 사람들이 거니는 것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생각에 잠긴 채 사진들과 형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지요.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사진

          사이로, 다른 방법 없이, 사진들과 모형들 사이로 다른 방법 없이 설명을 따라서 거닐고

          있었지요.

          히로시마의 박물관에 네 번이나 갔었어요.

          난 사람들을 눈여겨보았지요. 자 자신도 생각에 잠긴 채 철근을 바라보았지요. 불에 타버린,

          산산조각난 쇠, 살갗처럼 상처받기 쉽게 물렁물렁해진 듯한 쇠, 모아 놓은 뇌관들도

          보았지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아직도 생생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아 움직이는 듯하 사람의 피부,

          돌들, 불탄 돌들, 번쩍이는 돌들, 히로시마의 여자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몽땅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카락들.

          평화의 광장은 뜨거웠어요. 평화의 광장 위에 열이 1만 도나 되었대요. 난 알고 있어요.

          평화의 광장 위에 태양의 온도가, 어떻게 그것을 모르겠어요…? 풀, 그건 아주

          간단하지요……

남자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여자  그 재현 장면들은 가능한 한 진지하게 만들어져 있었어요.

          영화들도 가능한 한 성실하게 만들어져 있었어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환영은 관광객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완벽했어요.

          쉽게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관광객으로서는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 다른 무얼

          할 수 있겠어요?

          나는 늘 히로시마의 운명에 대해 슬퍼했지요, 항상.

남자  아니오.

          무엇 때문에 당신이 슬퍼했단 말이오?

여자  나는 뉴스를 보았어요.

          둘째 날, 바로 둘째 날부터 땅속과 잿더미에서 분명하게 동물류들이 다시 나타났다고 역사가

          말해 주고 있어요.

          이것은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개들의 모습도 사진에 남아 있어요.

          영원히.

          나는 사진들을 보았어요.

          나는 뉴스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것들을 보았어요.

          첫날에도.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남자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여자  ……보름째 되는 날부터 역시.

          히로시마는 다시 꽃으로 뒤덮이게 되었지요. 도처에 수레국화와 글라디올러스, 그리고

          둥근잎 나팔꽃과 수선화들이. 그때까지 꽃들의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잿더미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지요.

          나는 아무것도 꾸며대지 않았어요.

남자  당신은 모든 것을 꾸며냈어요.

여자  아무것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는 그런 착각. 그런 착각이 사랑에도 존재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나는 히로시마를 보면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사랑과 마찬가지로.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히로시마 여자들의 뱃속에 있었던 생명들도 보았어요.

          히로시마의 일시적 생존자들이 평소에 그렇게 풍부하던 상상력이 그들 앞에서는 닫혀 버릴

          정도로 부당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내와 순박함, 그리고 외모에서 드러나는

          온화함을 나는 볼 수 있었어요..

 

 

 

 

내가 편협한 인간일까요? 시놉시스를 읽을 때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왜 일본은 자연스럽게 동정을 얻는가?

- 악랄한 인간은 잊혀지고, 악랄한 무기는 잊혀지지 않는 것인가?

-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악착같이 새로 태어나고 새로 시작하지만, 물질의 '끔찍한' 흔적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인가?

 

남성(일본인)은 줄곧 심문하듯 여성(프랑스인)의 말을 부인하고, 여성은 죄인처럼 고백하듯, 참회하듯, 변명하듯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남성은 철저히 응징하려는 듯 끝까지 그 어조를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싫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기계나 무기로써 한 일을 인간의 악랄한 힘으로도 다 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기록을 지우는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증거만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증거를 대어보라는 말을 벌써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우리는 정말로 아무런 증거를 대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박물관, 평화의 광장을 만들어 놓았지만, 우리는 있는 것도 다 부수었고, 남아 있는 것들도 없애버리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기억하지 않는지, 왜 잊으려고만 애쓰는지, 가령 조선총독부 건물은 어디로 갔는지 - 일본인들을 향해 "봐라, 이 사람들아! 이게 우리를 위해, 이 궁궐 안에 이렇게 흉하게 지어놓은 거냐?"고 따져볼 수 있는 - 다 어떻게 했는지, 그렇게 해놓고 어떻게 이처럼 희희낙락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의한 참상에 비하면, 악랄한 인간들에 의한 식민 지배의 고통, 서러움, 부당함 따위는 충분히 참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까?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작품 한 편에서의 인용이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고, 사실은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도 인용을 하려면 끝이 없는 일입니다. 가령 저 프랑스 여인은 일본인들에게서 "부당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내와 순박함, 그리고 외모에서 드러나는 온화함"을 볼 수 있었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순한 양'이었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범'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전범은 누구입니까?

 

일본, 히로시마에서의 시위의 이유는, "어떤 국민들에 의해 다른 국민들과 달리 원칙적으로 제기된 불평등, 어떤 민족들에 의해 다른 민족과 달리 원칙적으로 제기된 불평등, 어떤 계층들과 달리 다른 계층에 비해 원칙적으로 제기된 불평등에 대한 분노"랍니다.

 

이건 - 그런 불평등은 -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그렇게 당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분노해야 합니다. 35년간이나 지배해 놓고는 우리를 위해 은혜를 베푼 것처럼 설명합니다. '순한 양'이, '불평등을 싫어하는 국민·민족·계층이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럼,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은혜를 좀 베풀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네들이 앞서 있으므로 그런 걱정 말라고 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앞서는 국력을 길러 놓고 이제 "그 은혜를 갚아 주겠다"고, "괜찮다"고 하더라도 기어이 갚아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강물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피끓는, 어쩌면 가장 애끓는 목소리로 그린 시나리오입니다.

 

그 여인은 독일 지배 하의 프랑스 느베르에서 독일 병사를 사랑했고, 독일의 패퇴와 함께 그 사랑을 잃은, 그 병사가 프랑스인들의 악랄한 앙갚음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 분노, 그 광기에서 헤어나온 여인이기 때문에 히로시마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나리오에서는 그 기억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그걸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습니다. 원자폭탄은 그 위력이 너무나 강력한 무기여서 안 되고, 일본이 우리에게 휘두른 폭력은 그보다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어서 얼마든지 용서하고 잊을 수 있는 것인지,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일본 총리는 이제 '전범'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 그 전범이 미국에 있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이 없었다는 뜻입니까?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사면되었다는 뜻입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합니다.

- 일본인에 의한 『코리아 내 사랑』 같은 작품은 왜 없는 것일까요……

- 우리에게는 왜 오페라 『나비부인』의 그 허밍코러스가 없을까요……

 

오페라 『나비부인』? 그러고 보면, 교육부터 정신차려야 합니다. 왜 쓸데없는 것들을 암기시키는 데 혈안인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오페라 『나비부인』도 보고, 『히로시마 내 사랑』도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읽어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얘들아, 이런 것도 있다. 우리는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겠나?"

 

고교생이라면 사지선다형, 오지선다형보다 이 책 『히로시마 내 사랑』도 필독도서에 넣어 꼭 읽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교과서와 문제집, EBS 교재만 필독도서입니까? 『히로시마 내 사랑』은 '성인용'이어서 곤란합니까? 그런 시시한 이유 좀 달지 말고 많이 읽게 하면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다른 작품(소설) 『연인』에는 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묘사가 보입니다.*

 

 

내게는 전쟁도 어린 시절과 똑같은 색깔로 기억된다. 전쟁 기간은 큰오빠가 군림하던 시기와 혼동된다. 그건 아마도 작은오빠가 전쟁 중에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이미 말했듯이 작은오빠는 심장이 멈췄고 그렇게 잊혀 갔다. 전쟁 동안에는 큰오빠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또한 모든 것에 섞여 들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생각 속에도 존재하며,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시종일관 제어할 수 없는 취기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스러운 영토 같은 어린아이의 몸을, 나약한 자들이나 패배한 민족들의 육체를 점령한다.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 일본인들에게, 특히 "전범은 없다"는 일본 총리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일제 35년간 일본은 우리에게 저 오빠 같은 존재였고,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시종일관 제어할 수 없는 취기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스러운 영토 같은" 우리의 몸을, 나약한 우리, 패배한 우리 민족의 육체를 점령하고 있었고, 사실은 그 흔적이, 그 상처가 지금도 우리의 모든 것에 섞여 들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생각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혹 한국인들은 사랑도 하지 않고 살았고, 사랑도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인 줄 아는 건 아닌지.

적어도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면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 한가운데에 한국인도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다시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 일본인, 히로시마인였나요?"

 

 

 

* 마르그리트 뒤라스, 김인환 옮김, 『연인』(민음사, 2011),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