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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Ⅰ

by 답설재 2012. 1. 10.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정영란 옮김, 민음사 2011

 

 

 

 

 

J 선생님.

 

날씨가 차갑다면서 외출할 때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한참 동안 행복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 줄까 생각하면 저는 얼마든지 행복해도 좋을 것입니다.

 

정말로 좋은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문학작품인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그 '종교'를 우리가 해석하고 싶은 '교육'이라고 해도 좋다면 얼마든지 좋은 책입니다. 정말이지 이처럼 진지하게 읽은 책이 내게는 과연 몇 권이나 될는지 의심스럽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서투르고, 쑥스럽고, 어리석고, 불운하고, 스스로 쓸모없는 인물이라고 여기는, 그렇지만 선량하고, 순수하고, 그 무엇보다 사제다운(교육자다운) 이 시골 신부님에게는 가르침을 주는 선배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선배 신부님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젊은 친구, 가르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라는 둥 '차차 알게 될 거야.'라는 둥 가르친답시고 감언이설로 얼버무리는 작자들 생각과는 다른 일이야. 그 작자들은 위로하는 진리라고 말하지. 하지만 진리란 먼저 자유롭게 해주고*(「요한」 8장 32절 참조) 그다음에 위로를 하는 것이지. 게다가 그네들이 운위하는 위로를 참위로라고 부를 권리도 없지. 차라리 그건 조문(弔問)이지! 하느님의 말씀! 그건 벌겋게 단 쇠일세. 그런데 그 진리를 가르치는 자네는 손으로 덥석 움켜쥐지 않고 화상을 입을까 봐 부젓가락으로 그걸 집으려 들 텐가? 나 참 우스워서. 진리를 가르쳐야 할 강단에서 입매를 암탉 부리같이 만들고 약간 들뜨긴 했지만 만족해서 내려오곤 하는 사제는 강론을 한 게 아니고 그저 기껏해야 잠꼬대를 한 것뿐이야. 이런 일은 하기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 우리 모두가 측은한 잠보들이니까. 때로는 오히려 마귀가 잠에서 먼저 잘 깨지. 사도들을 보게. 겟세마니(「마태」 26장 36~46절 참조. 예루살렘 성전 맞은편 '올리브산' 기슭의 동산. 예수가 처형당하기 전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최후로 기도를 드린 곳)에서 잘도 자지 않았나! 어떻든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네. 이삿짐 나르는 인부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이런저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늘 더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말이야. 내가 감히 주장하자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유익한 어떤 한마디라도 우연히 내 입을 통해 나오게 해 주신다면 나는 그 말이 내게 주는 고통을 통해 그것을 깨닫게 된다네."(79~80)

 

이 시골 신부님은 토로시의 그 신부님을 너무나도 존경합니다. 가령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분이 아직 망설이고 계심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 적어도 어쩌면 같은 어법으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것을 털어놓으시기 전에 나를 마지막으로 가늠하고 판단해 보려는 듯 보였다. 그분이 나를 의심의 눈으로 바로보고 계시는 것이 역력했으나 맹세컨대 이런 의심은 전혀 모욕적이지 않았다. 하기는 그분은 그 누구도 모욕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 순간 당신의 시선은 매우 다정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거의 세속적이라고 할 만큼 강인하고 건장하며 인생과 사람들에 대해 아주 풍부한 경험을 하신 분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 시선은 정말 놀랍고도 형언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였다.(84~85)

 

그분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셨다. 당신의 속내를 늘 말없이 들어 주던 친숙한 방 안의 집기들과 나라는 존재를 구분하려고 그러셨던 건지 나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아니다! 그분은 나를 보시지 않았다! 나를 설득하려는 의도밖에 없었다면 당신의 시선에 그토록 비통한 빛이 어릴 리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은 백번 꺾이고 백번 물리쳤지만 여전히 반항하는 자신의 어느 한 부분과 겨루며, 자신의 생명을 위해 투쟁하는 한 인간이 그러하듯 제 키만큼, 온 힘을 다해 바로 자기 자신을 추스려 다시 일어서는 당신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깊은 상처였던지! 그분은 당신 손으로 스스로를 찢으시는 듯 보였다.(86)

 

이 시골 신부님이 일기에 이렇게 썼을 때 토로시의 신부님은 바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토로시 본당 신부님의 이 말씀들도 다 그 시골 신부님의 일기에 적혀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이러니……" 하고 그분은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그네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란이라도 일으키라고 설교하고 싶다네. 아니, 차라리 나는 그들에게 아무 설교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나는 외려 우선 저 '투사들', 말로 벌어 먹는 사람들, 혁명 조작꾼들 한 무리를 붙잡아다가 플랑드르 출신 사내가 어떤지를 보여 주고 싶다네. 우리 플랑드르 사람의 피에는 반항심이 흐르지. 역사들 더듬어 보게나! 귀족이나 부자들이라 해서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준 적은 결코 없지. 지금의 나니까 선뜻 고백할 수 있는데 감사하게도 나는 아주 건장하지만 천주께서는 내가 육욕의 유혹을 그리 많이 받게 허락하지 않으셨네. 하지만 불의나 불행이라면 내 피가 들끓어오르지.(86~87)

 

그렇다고 토로시의 신부님이 무슨 투사처럼 그러시는 건 아닙니다. 제가 J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은 토로시의 신부님께서 그 시골 신부님께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J 선생님께서 가령 '투사'로 나서시는 것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하등의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략)… 자네는 위선자, 방탕한 이, 수전노, 고약한 부자가 두꺼운 아랫입술을 내민 채 눈을 번쩍여 가며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Sinite parvulos."라고 암송하는 걸 들을 기회가 있겠지. 한데 그자들은 그 말씀 뒤에 곧 바로 따라오는 말씀, 아마도 인간의 귀가 여태 들어 본 말씀 중 가장 준엄한 말씀, "너희가 이 어린이들 중 하나와 같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에는 아랑곳 않고 그렇게 오고들 있는 거야." …(중략)… "자네도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이상적인 것은 복음을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선포하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계산이 많거든. 그게 바로 악이지. 그러니 우리는 가난의 정신을 그저 입으로만 가르칠 뿐이지. 그런 게 그게, 여보게, 정말 힘든 일이지! 그러니 이러저리 정황에 맞추려 애쓸 수밖에. …(중략)… 그런데 저주에도 아마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경우는 대충 넘어가고 말지…… …(중략)… 저 외교관마냥 능란한 사람들이 예의 그 바늘구멍은 예루살렘 성문으로서 그저 다른 문보다 조금 더 좁을 뿐이고, 부자가 그 문을 통해 도성 안에 들어갈 때 그저 장딴지 살갗이 좀 벗겨지거나 입고 있는 웃옷 팔꿈치가 조금 닳을 뿐이라고 넌지시 암시해 버리니 얼마나 난처한 일인가 말이야! 우리 주님은 실은 옛 금화를 넣어 놓은 전대에 친히 "위험 ─ 만지면 사망"이라고 쓰셨을 걸세. 마치 도로공사에서 변압기를 설치한 기둥 위에 표시하듯 말이야. 그런데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82~84)

 

 

J 선생님.

 

우리들 중에도 겉으로만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선생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요즘은 심지어 아이들을 보고 '악마'라고 지칭하는 악마들도 있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어안이 없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부자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일에 대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여기는 교육자는 - 까짓 거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진짜 돈 많은 부자들 이야기는 생략할 수밖에 없겠지요 -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정말이지, 저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J 선생님께 전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생각대로라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여기에 옮겨 놓고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일입니까. 그러므로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J 선생님도 추위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은 추위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아침마다 기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