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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Ⅱ

by 답설재 2012. 2. 12.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정영란 옮김, 민음사 2011

 

 

 

 

 

 

 

 

한 달이 더 걸려 읽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아서 때로는 좀 미안해지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이 단순하고 서투르고 촌스럽고 가난한 신부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서글픕니다. 이제 어떤 책을 읽어야 이 허전함을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이야기여서 당연히 종교적인데도 취향에 꼭 맞는 책이었습니다.

 

하루에 한두 페이지씩 읽었습니다. 마치 詩 읽듯했습니다. 해설을 합쳐서 436쪽이니까 한 달 이상 하루에 겨우 한두 페이지를 읽었는데도 온통 이 신부님 日記를 읽는 데 힘을 쓴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스울지 모르지만 문장도 시가(詩歌) 같아서 몇 번을 거듭 읽다가 졸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그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詩를 읽을 때처럼 그냥 그렇게 넘긴 곳도 많았습니다.

 

 

 

 

우리의 신부님께서 위암 선고를 받고 임종을 생각하시는 심정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 중대한 날도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날이 그저 두려움 속에 다 저문 것은 아니지만 곧 시작되려는 날도 영광 속에 터 오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음에 등을 지지는 않으나 올리비에 씨라면 정녕 잘 해낼 것처럼, 죽음과 대적하지도 않는다. 나는 죽음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겸손한 눈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그런 나의 시선은 죽음을 무장 해제하듯 달래 보려는 은근한 희망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비유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라면 나는 죽음을 예전 쉴피스 미토네나 샹탈 양을 바라보았던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슬프다! 정녕 그리되려면 어린아이들의 무지와 단순성이 필요하리라.

 

내 운명에 대해 이리 각오를 하기 전, 때가 왔을 때 제대로 잘 죽음을 맞지 못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여러 번 엄습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이지 심약하기 때문이다. 이 일기에 써 둔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친애하는 델방드 노의사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수사나 수녀들이 언제나 임종을 잘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들 한다. 이런 걱정을 지금 나는 하지 않아도 좋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의 용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최후가 완벽하고 완결되기를 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나도 잘 이해한다. 나로서는 그럴 수도 없으니 나의 임종은 그저 저 생긴 대로 진행될 것이다. 만약 이런 말이 너무 대담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진정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 아무리 아름다운 시 구절이라 하더라도 더듬거리는 고백만 못하다고 나는 말하련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비유가 아무에게도 거슬리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임종은 우선 사랑의 행덕(行德)이니까.

 

하느님께서 나의 임종을 하나의 모범, 하나의 교훈으로 만드실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일으킬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는가? 나는 사람들을 무척 사랑했고 산 자들의 이 땅은 내게 아늑했음을 지금 생생히 느끼고 있다. 나는 눈물 없이는 죽지 못할 것이다. 극기주의적 냉정함보다 나와 동떨어진 것이 없는데 내가 어찌 저 무감동한 자들의 죽음을 바라겠는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주인공들은 내게는 모두 섬찟함과 권태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내가 만일 그런 유로 가장하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내 수호천사마저도 웃을 것 같다.

 

왜 걱정하고 왜 지레 판단한단 말인가? 무서우면 무섭다고 부끄럼 없이 말하리라. 그러니 그분의 '거룩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날 때 주님의 첫 눈길은 안도시켜 주시는 눈길이기를!(404~406)

 

 

 

 

"나는 죽음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겸손한 눈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슬프다! 정녕 그리되려면 어린아이들의 무지와 단순성이 필요하리라……"

 

"인간의 임종은 우선 사랑의 행덕(行德)이니까……"

 

"내가 만일 그런 유로 가장하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내 수호천사마저도 웃을 것 같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부끄럼 없이 말하리라. 그러니 그분의 '거룩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날 때 주님의 첫 눈길은 안도시켜 주시는 눈길이기를!"

 

 

이렇게 예문을 보여주는 것도 신부님께는 미안한 일이겠습니다. '이것 봐, 여기도 그렇잖아. 詩 같잖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그걸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부분을 읽고는 책을 덮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뒤플루이 부인은 나를 혼자 남겨 두고 계산대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손님들이 막 들어왔다. 새참을 먹으러 온 노동자들이었다. 그 둘 중 한 사람이 칸막이 너머로 나를 보았고 나머지 패거리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들이 내는 소음은 내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 반대였다. 내적 고요 ── 천주께서 강복하시는 바로 그 고요 ── 는 나를 사람들에게서 고립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이 바로 그 고요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고 나는 마치 내 집 문지방에서인 양 그들을 맞아들인다. 그런데 그들은 분명 자기들도 모르는 새 거기에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처럼 일시적 피난처밖에는 제공하지 못하니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하지만 어떤 영혼들의 정적은 아주 넓은 피난처처럼 상상되곤 한다. 가여운 죄인들은 기진하여 더듬더듬 그곳을 찾아들어 잠이 들었다가, 그네들이 잠시나마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던 그 보이지 않는 커다란 성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갖지 못하지만 그래도 위안을 받고 다시 떠나는 그런 피난처 말이다.

 

…(중략)…

 

오직 침묵을 지킬 일이다. 침묵이 허락하는 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이 몇 주, 몇 달까지 갈 수도 있다. 아까만 해도 필경 어떤 한마디 말, 어떤 동정어린 눈길 한 번, 어쩌면 단순한 질문 하나만 받았어도 이 비밀이 그만 내게서 새어나갔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노라면……! 비밀이 내 입술 위에 벌써 올라왔지만 곧바로 하느님께서 그것을 붙잡아 주셨다. 물론 사람들의 동정이 한순간의 위안이 되어 준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기에 그걸 경멸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갈증을 진정으로 풀어 주지 못하며 구멍 뚫린 체를 거쳐 물이 새듯 영혼에서 흘러나가 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이 마치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듯 이 동정심에서 저 동정심으로 옮겨 다닌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더 존경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돌아오니 뒤플루이 부인이 자기 점심을 나눠 주었다. 나는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토르시의 신부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부인은 신부님이 프렐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적에 그분을 알았다고 했다. 그 여자는 그분을 퍽이나 무서워했다. 나는 삶은 고기와 채소를 먹었다. 내가 나간 사이 그녀가 난로를 지펴 놓았고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진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따뜻한 그곳에 나를 혼자 남겨 놓고 자리를 떴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잠시 졸기까지 했다. 잠이 깨자……

 

(오, 천주여, 저는 적어 두어야만 합니다. 이 아침들, 지난 며칠 동안의 아침들, 그 아침들이 어떻게 저를 맞아 주었는지를. 그리고 수탉들의 합창을…… 저 고요한 높은 창문의 유리 한 칸, 언제나 같은 그 유리창, 오른쪽 유리창이, 아직 밤 그늘로 가득한 중에도 불타오르듯 환해지는 것을 저는 떠올리나이다…… 이 모두 그 얼마나 신선하고 순수한 것이었는지요……) (359~362)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신부님이 두고두고 그리울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해도 다 헛된 이야기 같고, 듣기도 싫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욕심을 털어놓는다면, 저도 저렇게 떠나는 날 아침, 외로워도 좋고 궁색해도 좋고 서툰 것처럼 보여도 좋으니 부디 "모든 것이 은총"이라며 떠나신 신부님처럼 어린이 같은 마음, 단순화된 마음으로 그렇게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기에 교회로 하느님을 찾아오라고 한다면 저는 싫습니다. …… 그 대신 저 신부님 이야기를 언젠가 다시 읽겠다고 하겠습니다. 덧붙여서 내게 교회로 오라고 하는 당신도 한번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겠습니다. 거기에, 신부님의 일기에, 신부님께서 하느님에 대해, 하늘나라에 대해, 교회에 대해, 뭐라고 쓰셨는지 그것부터 읽어보라고 하겠습니다.

 

좀 수다스럽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신부님은 참 단순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단순하고 서투르고 촌스럽고 가난하고 서글픈 것이 제게는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이제는 좀 단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만큼은 단순해질 수 없겠지만…… 이걸 삶이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번민하며 지내겠습니까. 정말로 한심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 서너 명이 장난을 치던 그 개울가에서, 우리를 달래던, 교회를 다니라고 하시던 그 수녀님이 그립기는 합니다. 우리가 참 못 돼먹은 소리를 하는데도 수녀님은 미소를 띠고 낮고 작은 목소리로 자꾸 그 이야기만 계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