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 외손자 선중이가 바로 그 ‘별종(別種)’입니다. 근근이 키워 지난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그때부터 그 어미는 더 깊은 고난의 골짜기로 들어섰습니다. 그럴 줄 미리 알고 인천 모 여고 일어 선생도 집어치우고 들어앉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어림없는 수작이 되었습니다.
우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아무리 취학 전 아이들이라도 음식점 같은 곳에 데리고 가면 최소한의 공중도덕은 지킬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고, 주제에 교육자랍시고 사람들을 만나면 일본의 가정교육을 예로 들면서 그걸 강조해왔지만 제 손자가 엉망인 걸 확인하자 그만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경솔하게 이야기하다가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 싶었습니다. 오죽하면 도장방에 가서 목판에 “한 번 더 살펴보고 한 번 더 생각하고”라는 글을 새겨 그 애 방에 걸어놓았겠습니까. 그래 놓고는 어미에게 부탁했습니다.
“나 죽고 나서도 저 녀석이 저렇거든 저걸 떼어내지 말고 가훈(家訓)이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게 해라.”
학교에 들어가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다 늘어놓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행동을 설명해야 할까요. 차라리 친구가 많아져서 살판났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글자를 익힐 때 얘기나 하겠습니다. 마침표(•)는 공책의 한 칸을 4등분한 왼쪽 아래 가운데에 동그랗게 찍어야 하는데, 이 아이는 문장은 멀쩡하게 써놓고 아예 그 마침표를 찍질 않았습니다. 그것도 어쩌다 찍지 않는 게 아니고 아예 한 번도 찍은 적이 없으며, 숙제를 할 때 어미가 두 시간 동안이나 사정을 해도 절대로 찍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미는 울며불며 닦달을 해대었고, 너무나 속이 타서 스스로 제 가슴을 쥐어뜯기만 하다가 드디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날도 마침표가 문제였습니다. 어미의 하소연이야 들어봤자 별 수 없고 아이를 바꾸라고 해서 직접 물어보았더니 이런 대답이 들렸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바빠요. 할 일이 많아요.”
(이것 봐라?) 바쁘다는 건 놀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바쁜데 마침표를 뭐하려고 찍어요? 물음표(?) 같으면 쓰겠어요.”
“…….”
“할아버지, 마침표는 찍지 않아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어요.”
결국 저조차 그 애와 옥신각신했습니다(아무리 봉급 받아 생활하며 가르친다지만, 이런 놈도 가르쳐주시는 인천굴포초등학교 1학년 3반 이봉순 선생님, 만세!!!). 그러다가 지쳐 어미에게 부탁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모자간에 들어앉아 싸우며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고 그러지 말라고. 초등학교 교장인 외조부가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도 갔습니다. 남들은 집안 더러워진다고 아예 남의 아이들을 못 들어오게 하는데, 이놈은 어미야 죽어나가든지 말든지 막무가내여서 결국은 시간제 청소부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찾아와서 제 외할머니와 대화하는 걸 들었습니다.
“할머니, 저는 세 가지 소원이 있어요.”
“세 가지나?”
“첫째는, 과자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괜찮으면 좋겠고요.”
“또?”
“둘째는, 채소가 맛있으면 좋겠고요.”
“그럼, 나머지 한 가지는?”
“컴퓨터나 닌텐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건강 같은 건 문제 없으면 좋겠어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그 애가 나중에 그 중 한 가지라도 해결해냈으면 하는 게 제 소원이 되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2
우리 아파트 12층에 사는 4학년짜리 H는 2학년 때까지는 담임들이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라는 판단을 했답니다. 제가 이 아파트로 이사 와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그 아이와 그 애의 여동생은, 제가 봐도 ADHD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그 좁은 엘리베이터 안을 운동장인 줄 알았습니다. 그 애들 엄마가 있거나 말거나 제가 나서서 꾸중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애가 3학년을 지나 4학년이 되더니 영 달라졌습니다. 아주 다소곳이 서 있고,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자세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었습니다.
“수영 마치고 영어 학원 다녀오는 길이에요. 할아버지, 인도 말로 ‘안녕하세요?’가 뭔 줄 아세요? 우리 영어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는데요. ‘나마스떼’래요.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마스떼.”
어느 날은 희한한 귀신가면을 쓴 채 들어오며 말했습니다.
“제가 누군지 맞춰 보세요."
"음, 이게 누군가? 영 모르겠는데?"
"오늘은 할로윈데이에요. 가면극을 하러 학원에 가는 길이에요.”1
지난 월요일 아침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한꺼번에 만났습니다. 의례적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 애가 나섰습니다.
“할아버지, 오늘은 더 멋지게 보이세요.”
장면이 그렇게 전개되자 그 애 어머니는 아주 난처해했는데, 순간 여동생이 덧붙였습니다.
“제가 봐도 그래요. 정말이에요!”
제가 멋있는 사람은 아닌 줄 번연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멋이라고는 눈 닦고 봐도 없는 주제지만 마음만이라도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너무 늦었을까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어른들도 이웃끼리 이렇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난체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 아파트 주민자치위원회에서 그 애를 강사로 초청해서 ‘멋있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키면 그 애는, “바로 이런 할아버지가 멋있는 사람”이라며 저를 내세워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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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로윈데이 Halloween day (국립국어원, 1999년 10월 신어 자료집) ‘모든 성인의 날’인 11월 1일의 바로 전날인 10월 31일을 ‘모든 성인의 날 전야’ 대신 이르는 말. 서양 사람들은 이날 밤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되살아난다고 믿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어린이의 축제일로 유명한데 이날에는 어린이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할로윈의 상징인 호박을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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