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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수업공개」경험 - ‘허난설헌’님께 -

by 답설재 2008. 11. 7.

제 독자님 중에 ‘허난설헌’이란 닉네임을 가진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글을 받아보는 제 입장에서 보면 너무 겸손한 표현을 해주신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 옮깁니다.


너무도 유치 무쌍한 질문인지라 -아직도 이런 걸 질문하나? 싶은- 비공개로 하려고 했으나 혹시 비슷한 의문을 가진 분들도 있지 않을까하여 낯 뜨거움을 무릅쓰고 이곳에서 여쭙니다.

"공개수업은 완벽한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하듯이 보여주어야 합니까?"

똑같은 내용을 가르쳐도 학생들마다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미리 리허설을 하지 않으면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게 수업현장입니다. 먼데서 일부러 보러 오신 분들을 위해 애초에 계획한 수업을 보여주려면 돌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한 통제해야겠지요. 하나의 수업모형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수긍이 잘 안됩니다.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답한다면, 참관자가 있으므로 당연히 최대한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시(本時)’에 학습할 내용을 미리 지도해보는 리허설이라면 그건 ‘교육(敎育)’이 아닐 것입니다. 1976년의 제 경험을 써놓은 글이 있어서 그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할까 합니다. 부디 양해하여 주십시오. 오래 전에 쓴 글이어서 좀 고치고 싶지만, 이미 발표된 것이므로 그대로 옮깁니다.


연구 결과 보고가 끝나고 수업 참관 시간이 되자, 전국에서 온 교장과 교사들 대부분이 도덕 수업을 공개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 교실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전국적으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교실 뒤와 옆은 물론 복도에서 창 너머로도 들여다보는 속에서 동물원에 갇힌 짐승 신세가 되어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그런 꼴이었다.

그 시간에 내가 하려는 수업은 시민 두 명이 간첩을 만난 상황을 설정하고, 시민 1, 2와 간첩 배역을 정하여 시민이 간첩의 마음을 돌려 귀순시킨다는 내용의 역할놀이학습이었다. 수업 공개를 위하여 대부분의 아이들이 똑똑한 목소리로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봄부터 그 가을까지 연습을 잘 시켜 두었으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간첩을 만난 시민’에 대한 역할놀이 연습을 시키지는 않았다. 같은 내용으로 사전 연습을 해두면 재미가 없어 수업에 맥이 빠지기 때문이었다. 미리 짜놓은 전략 한 가지는, 평소에 비장의 카드 구실을 하는 똑똑한 아이들을 얼른 등장시키면 결국 한 시간의 수업을 끌고 가기가 어려워지므로 수업의 전반부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의 아이들을 많이 등장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수업을 시작하자 그 전략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간첩을 귀순시키는 장면 연출이 끝날 때마다 전체 아이들이 역할 수행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그러한 연출을 두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그 수업의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시민 역할을 맡은 두 명의 아이가 번갈아 가며 말하는데도 한 명의 간첩에게 밀려 처음부터 계획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간첩은 김일성 수령이 있는 북한이 더 살기 좋은 곳이니 어떠니 하면서 점점 더 자신만만해지는데 비해 시민 두 명은 우물쭈물 몇 마디 하더니 그만 말문이 막혀 시간만 끌고 있으니, 그 상태로 그 연출을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어 알게 되었지만, 덩달아 나도 얼굴이 달아오르다가 하얗게 질렸다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기만 하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드디어 시민 두 명이 간첩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학습이라고는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었고, 그것도 문교부 지정 전국 공개 보고회의 유일한 시범 수업이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구경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수업 참관자들은 대체로 잠시 들렀다가 가는 손님들처럼 이 교실 저 교실로 흘러왔다 흘러가는 법인데 이 날은 한 사람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토론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다른 아이들을 등장시키겠다고 선언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것 봐라! 간첩을 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처음의 간첩이 말하는 걸 지켜본 아이들은 이제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듯 똑똑한 아이들은 너도나도 손을 드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손을 내리게 하고 먼저 시민부터 뽑겠다고 했더니 몇 명이 손을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만한 아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들은, 방금 간첩을 하겠다고 너도나도 손을 든 아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을 때 간첩으로 뽑힐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말하자면 2류 정도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시간의 수업을 어떻게 마쳤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한 느낌을 갖는다.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전체 토론회 시간에 내 수업을 참관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었다.

“꾸밈없는 수업을 보았다.”

“선생님께서 당황한 만큼 우리도 당황하여 그 수업을 지켜보았다.”

“선생님께서는 그 위기에서 슬기롭게 대처했다.”

아이들의 생각과 아이들의 이야기로, ‘살아있는 학습’을 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 역할놀이학습이다. 가령 독도 문제를 가지고 우리 대통령과 일본 수상이 만나 회담을 하는 장면을 설정했다면, 독도 문제에 대한 사전 연구를 충분히 시켰다 하더라도 대통령과 수상의 역할을 맡은 사람에 따라 대화가 달리 전개될 것이므로 회담 결과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역할놀이를 본 나머지 학생들이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할놀이학습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겉으로 보아서는 역할놀이학습과 유사하나 실제로는 '앵무새놀이‘를 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교사는 각 배역에 맞추어 미리 준비해둔 대본을 주거나 대사를 만들어 외우게 할뿐만 아니라 그 간단한 역할놀이를 시키기 위해 흡사 연극을 할 때처럼 왕과 왕비의 복장을 마련하게 하고 무대를 궁궐처럼 꾸미기도 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말하자면 역할놀이와 연극 연습을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사들은 연출의 상황만 제시하고 실제 연출은 아이들의 생각에 맡겨서 진행하는 역할놀이학습을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멋대로 말하다니, 아이들은 모든 것을 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사가 보기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졸저,『보고 읽고 생각하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아침나라, 2005)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