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건너편의 활엽수들이 가을을 보여줍니다.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아침 다르고 오후가 다릅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제 온 나무가 다 붉어졌구나.’ 했는데, 점심을 먹고는 그 붉음이 더 맑아진 걸 확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의 저 윗부분이, 붉게 물드는 나무는 좀 칙칙한 붉은색, 노랗게 물드는 나무는 노란색 가루를 뿌린 듯했는데, 그 붉음과 노랑이 차츰 아래로 내려왔고, 드디어 오늘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칙칙하던 그 색이 차츰 깨끗해지는 걸 보면 결국에는 선홍색, 선황색이 될 것입니다.
설악산 같은 곳은 어떻겠습니까. 속초의 안병영 전 부총리가 생각납니다. 그분이 알면 좀 곤란하지만, 지난여름에 볼일이 있어 택시를 맞추어 속초에 갔었습니다. 설악산 기슭을 넘어 오가며 가을에는 저 울창한 숲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싶었습니다. 그 숲에 지금쯤 야단이 났겠지요. 그분에게는 전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피워대는데, “이젠 담배를 끊으면 좋겠다”, 그 부탁을 또 들어야 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연전에는 왜 엉뚱한 생각을 하느냐며 속초에서, 그 바닷가 마을에서 들려오는 꾸중을 30분간이나 들었습니다. 혼자서 좀 씩씩대다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 나이에 꾸중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다행이지.’ 광화문 정부청사에 근무할 때는 결재를 받으러 들어갈 때마다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덜 피웠는지 냄새가 덜 나네요?” 덜 나긴 뭐가 덜 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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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참 열정적입니다. 교육부에서 십여 년간 열한 분의 장관을 보며 어느 분에게나 ‘이분은 이렇구나’ 했지만, 그렇게 열정적인 분은 그분뿐이었습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인터넷으로 간밤에 벌어진 세상일들을 다 훑어보고, 오늘 할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제 일어났겠지' 싶으면 알아두어야 할 사항에 대해 전화를 했습니다. 가령, “고등학교 전문교과는 몇 과목이죠?”(445과목)
그분은 또 결재를 해준 모든 서류를 비서실에서 복사해두게 했습니다. 신문에 기고한 모든 원고의 파일도 받았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 모든 부서의 일에 대해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교육부를 나온 후 조금 더 있다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찾아와서 아이들에게 한 시간 문답식 강의를 해주고, 교사들에게도 두 시간 대담을 해주었습니다(그들이 뭘 기억하고 있을까요?). 2007년 초봄, 정년이 되어 훌쩍 속초로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왜 거기 가서 사느냐고 자꾸 물었을까요? 이렇게 썼습니다(‘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2008.4.10. ‘편지’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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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정년이 이제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듯합니다."라고 했듯이 저는 내년만 지내면 정년입니다. 그러면 뭘 해야 합니까? 그분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깊은 생각 말고 골프치고 해외여행 다니면 되나요? 서양에서는 초등학생 때 골프 배운다는데, 이보다 더 건강하면 그 건강, 뭐에 씁니까? 필요할 때도 가지 않은 해외여행은 또 왜 갑니까?
가을인데……, 가을이어서 그런지,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추신 : 그분은 교육부에서 내보내주면서 "십수 년 날밤을 새웠으니 이제 신념대로 아이들 교육에 파묻혀 선비답게(사실은, '선비처럼'이겠지요) 살아가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해야 할까요, 송구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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