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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황인숙8

황인숙 「이제는 자유?」 이제는 자유?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오네. 점점 차거워지네. 서리가 끼네. 꼬들꼬들 얼어가네. 줄이 비비 꼬이네 툭, 툭, 끊어지네. 아, 이제 전화기에서 뚝 떨어져 자유로운 수화기. 금선이 삐죽 달린 그걸 두고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네. 전화기에서 천 리 만 리 떨어진 곳도 갈 수 있다네. ―황인숙(1958~ ) 산골 집에 갑자기 폭설이 내려 발이 묶인다. 눈 내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묘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눈이 만들어주는 자유. 두절(杜絶)이 만들어주는 자유. 그러나 이내 그 자유의 훼방꾼, 휴대폰이 울린다. 이 귀엽고 발랄하고 탱글탱글한 언어의 스프링을 얻어 타본다.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온다'면 이제 전화 걸어오는 이가 확연히 줄거나 아예 없어진다는 .. 2024. 1. 8.
문정희 「얼어붙은 발」 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 2022. 11. 9.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이제니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너는 책상으로 가 앉는다. 맞은편에는 비어 있는 의자. 비어 있음으로 가득한 의자. 책상 위에는 먼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가 놓여 있다... 2022. 2. 5.
「검고 붉은 씨앗들」 검고 붉은 씨앗들 황인숙 고요한 낮이었다 "주민 여러분께 쌀국수를 나눠드립니다! 서두르세요, 서두르세요! 이제 5분, 5분 있다가 떠납니다!" 집 아래 찻길에서 짜랑짜랑 울리는 마이크 소리 나는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얼굴로 슬리퍼를 꿰신고 달려 내려갔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른 명 남짓 모여 있었다 가만 보니, 마이크를 든 남자가 번호를 부르면 번호표를 쥔 손을 번쩍 든 사람한테 파란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비누도 주고 플라스틱 통도 줬다 어머나! 내가 눈이 반짝해서 파란 야구 모자 남자한테 번호표를 달라고 하자 그는 나를 잠깐 꼬나보더니 '에라, 인심 쓴다' 하는 얼굴로 번호표와 함께 인삼 씨앗 다섯 알이 든 비닐 봉투를 건넸다 벙싯벙싯 웃고 있는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에 섞.. 2021. 9. 6.
황인숙「철 지난 바닷가」 철 지난 바닷가 황인숙 나도 일요일을 사랑했었죠 바캉스를 아주아주 사랑했었죠 당신 나이에는 그랬더랬죠 그런데 이제 휴일이 별나지도 대수롭지도 않아요 이제 조용한 바다가 좋아요 사방에서 날아온 나뭇잎들이 좌충우돌하다 매미 떼를 따라 휩쓸려 갈 태풍 지난 뒤에나 바다에 가보겠어요 일요일들과 바캉스들을 가라앉힌 바닷가를 찰방찰방 거닐어보겠어요 발가락 새로 바닷물과 모래가 들락거리겠죠 하늘에선 햇빛이 들락거렸으면 좋겠어요 흰 구름 뭉게뭉게 피어올랐으면 좋겠어요 구름의 반그림자 속에서 당신과 만날 수도 있겠죠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레진 얘기를 하니 내 슬픈 금니가 떠오른다. 그 옛날에 내 칫솔질을 목격한 친구가 말했었다. "아주 이빨을 폭파시켜라!" 내 칫솔질은 좀 과격한 편이다.. 2020. 8. 23.
황인숙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황인숙 어젯밤 눈 온 거 알아요? 어머, 그랬어요? 아무도 모르더라 토요일 밤인 데다 날도 추운데 누가 다니겠어요 저도 어제는 일찍 들어갔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 우리나 알지 4월인데 눈이 왔네요 처음에는 뭐가 얼굴에 톡 떨어져서 비가 오나 하고 가슴 철렁했는데, 싸락눈이더라구 자정 지나서는 송이송이 커지는 거야 아, 다행이네요 그러게, 비보다는 눈이 낫지 동자동 수녀원 대문 앞 긴 계단 고양이 밥을 놓는 실외기 아래 밥그릇 주위에 졸리팜 곽 네 개 모두 뜯긴 채 흩어져 있었지 빠닥빠닥 블리스터들도 빠짐없이 비어 있었지 졸리팜 가루 같은 싸락눈 쏟아지던 밤이었지 ――――――――――――――――――――――――――――――――――――――――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198.. 2018. 12. 15.
황인숙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영혼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아무 힘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거지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은 고아들이 고달프고 고독하게 살다가 죽기 일쑤인 거지 없어, 없어, 없어, 죽은 다음에 영혼은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38. 아무리 그렇더라도 영혼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겠지. 있을 거라는 얘기겠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너무 억울하고 억장이 무너지고 그렇다는 얘기지. 힘이 없다는 건 그렇다 칠 수 있지.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해. 힘이 없는 그 영혼을 만나면 얘기할 게 더 많을 것 같아. 여기서 떠나가서. 그곳으로 건너가서. ……………… 저 구름 흘러가는 곳. 그리운 그 영혼이 있을 곳. 아무리 그렇더라도 영혼은 있어야 한다는 .. 2018. 4. 24.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황인숙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사 2016 그림자에 깃들어 이방인들을 보면 왠지 슬프다 한 아낙이 오뎅꼬치를 문 금발 어린애들을 앞세워 지나가고 키 작은 서양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회색 양복 서남아 청년이 지나간다 먼먼 땅에 와서 산다는 것 노인과 어린애 어느 쪽이 더 슬플까 슬픈 건 내 마음 고양이를 봐도 슬프고 비둘기를 봐도 슬프다 가게들도 슬프고 학교도 슬프다 나는 슬픈 마음을 짓뭉개려 걸음을 빨리한다 쿵쿵 걷는다 가로수와 담벼락 그늘 아래로만 걷다가 그늘이 끊어지면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걷는다 그림자도 슬프다 황인숙의 시가 눈에 띈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적 접근 방법을 의도적으로 시도하거나 독특한 시를 만들려고 애쓰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2018. 1. 5.